Friday, October 23, 2009

'샤를르 드 푸코(Charles de Foucauld)'의 『의탁의 기도』

오늘은샤를르 드 푸코Beato Carlo di Gesù (Charles de Foucauld) Religioso, 1858.9.~1916.12.』에 대해서 조금 정리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가톨릭 선교사로서사하라의 은자(隱者)라 불리 운샤를르 드 푸코는 프랑스의 군인이며 탐험가 이기도 했다. ‘샤를르 드 푸코 1882년 군에서 퇴역, 모로코를 탐험하고 『모로코 탐험기(1888)』를 펴냈다. 그 뒤 가톨릭에 복귀, 1888∼1889년 성지를 순례하였다. 1901년 사제가 되고, 같은 해 아프리카 오지 타만라세트(Tamanrasset)로 가서 그곳 말을 배워 원주민을 돌보아주어 존경을 받았으나, 1차 세계대전 중 원주민 반란으로 살해되었다. 프랑스에서는 1819년에 식민지에서의 포교를 후원하기 위한푸코회()’를 만들어 그의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1826년 이래 복자(福者)로 받들기 위한 운동이 추진되어 왔으며, 2005 11 13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 라틴어: Basilica Sancti Petri, 이탈리아어: Basilica di San Pietro in Vaticano)에서 복자(Blessed, 福者)()에 올랐다.
 
복자(Blessed 福者)란 로마 가톨릭에서 목숨을 바쳐 신앙을 지켰거나 생전에 뛰어난 덕행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고 믿어져 공식적으로 신자들의 공경할 만한 성도인 가경자(可敬者)에게 붙여지는 존칭으로 가톨릭의 준성인(準聖人)에 해당한다. 여복자는 복녀(福女)로 특별히 구별하여 호칭하기도 한다. 초대교회에서부터 순교자들에 대한 존경과 의탁(依託)이 있었는데, 차차 그들을 기념하는 날이 달력에 삽입되기 시작하였다. 복자샤를르 드 푸코(Charles de Foucauld)’의 축일은 121일이다.

의혹과 불신으로 교회를 떠났던 사막의 성자샤를르 드 푸코의 회심의 순간
 
10년이 넘게 신앙에 대한 의혹과 불신 속에서 교회를 떠나 있던 사막의 성자샤를르 드 푸코의 회심의 순간은 이랬다고 한다.
 
1886 10 27일부터 30일 사이 어느 날, 그는 아침 일찍 생오귀스탱 성당(Eglise Saint Augustin)으로 갔다. 그에게는 아직 확실한 결심은 없었으나, 자신도 확실히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움직여지고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진행되었다.
 
그는 고해소(confessional, 告解所; 가톨릭교회의 7성사(聖事) 중의 하나인 고해성사를 집행하는 장소)에 있는 위블랭 신부를 만나러 갔다. 그는 꿇어 앉지는 않았으나 종교에 대해서 가르쳐 주기를 원했다.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무릎을 꿇으시오. 하느님께 고해를 하시오. 그러면 믿을 수 있을 겁니다."
 
‘샤를르 드 푸코 "하지만……”, “나는 그것 때문에 온 것이 아닙니다.”라는 말을 하면서 무릎 꿇기를 거부했다.
 
신부가 되풀이 해서 말했다. "고해를 하십시오!"
 
이때샤를르 드 푸코는 자유롭게 돌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무릎을 꿇고 지금까지의 생활을 숨김 없이 모두 고해했다. 그가 몸을 일으켰을 때는 그리스도의 피로써 모든 죄의 사함을 받았을 뿐 아니라 한 번도 잊어 버린 일이 없는 듯한, 강하고 확고한 신앙을 다시 찾았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때 신부는 그에게 "아직 아침 식사 안하셨지요?" 하고 물었고, “아직 하지 않았다는 그의 대답을 듣고는 즉시 성체를 영해 주었다.
 
이것이 바로 29세의 청년샤를르 드 푸코가 운명을 결정짓는 첫걸음을 내딛은 순간이었다.
 
그는 교회의 문턱을 넘어섰던 것이다. 그 전에는 어떻게 하면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를 몰랐다. 어제까지만 해도 무엇 때문에 이 생오귀스탱 성당 주위를 원망과 불확실성에 주저 하면서 헤매고 있었던가를 오늘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찾아낸 환희는 너무도 강렬했기 때문에 그의 모든 것을 압도하고 말았다. 오직 한 가지 문제는 왜 이렇게 오랫동안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살았는가 하는 것이었다. 단 하루 사이에 그의 생활은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지난 10여년 동안 신앙생활을 멀리했던 그는 이 날 이후 매일 같이 위블랭 신부가 드리는 미사에 참례했다. 그는 매주일 고해성사를 보았으며 거의 날마다 성체를 영했다. 자기 스스로 그렇게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신부가 그를 이끌었으며, 그 또한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대로 응했던 것이다.
 
‘샤를르 드 푸코는 겨우 회개했을 뿐이었다. 회개는 종교에 있어서 마지막은 아니지만, 그의 회심은 그의 모든 존재를 진정으로 반역하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우여곡절을 겪은 뒤에 이 회심으로 그의 생활이 완전히 바뀌게 된 것이다. 영구적인 혁명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 것이다. 그의 육신과 영혼은 생오귀스탱 성당(Eglise Saint Augustin)으로 들어서면서 이미 변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하느님은 이렇게 가장 비천한 자리를 택하셨기 때문에 아무도 하느님으로부터 그것을 빼앗을 수가 없었다."라는 생오귀스탱 성당의 위블랭 신부의 말은, '샤를르 드 푸코'의 영혼 가장 깊은 곳을 찌르며 그이 일생의 좌우명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하나님을 본 받아서 그 시대의 사람들 중에서 가장비천한 자리를 찾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는 그가 그리스도와 가장 가까이 있을 수 있는 방법은 그것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존재한다고 믿게 되자마자, 나는 하느님을 위해서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 나의 수도 생활에 대한 성소는 나의 신앙과 동시에 시작된 것이다.”
 
오랜 방황 끝에 하나님을 찾은샤를르 드 푸코의 행적
 
오랜 방황 끝에 하느님을 찾은샤를르 드 푸코는 예수께서 나자렛에서 하신 가난하고 미천한 노동자로서의 숨은 생활을 본받고자 했다고 한다. 그는 43세에 사제 서품을 받고 예수의 나자렛 삶을 본받아 사하라 사막에서 가난하게 숨어 살며 민족과 종교의 담을 뛰어넘어 모든 이의 형제로 살다가 58세 때 타만라세트(Tamanrasset) 원주민들에게 피살된다. 그는 신자라고는 한 사람도 없는 이슬람교 신자들 사이에서 15년을 살며 살아있는 복음으로 하나님께 온전히 삶을 봉헌했다.
 
부모를 일찍 여읜샤를르 드 푸코는 젊은 시절을 쾌락과 무질서 속에서 보냈다.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 신분으로 북아프리카 반란군 진압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모로코 탐험 중 이슬람 신자들의 깊은 신앙에서 하느님 현존을 본 후, 그리스도교 신앙을 다시 찾기 시작했다.
 
그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은 사건은 나자렛 성지순례였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자렛이란 작은 마을에서 가난하고 비천한 목수로 숨어 사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의 마음에 특별한 성소의 싹이 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그때 "비천과 무명 속에서 가난한 장인으로 사셨던 우리 주님이 다녔던 나자렛 거리를 걸으며 나 자신이 예감하고 상상했던 삶을 살고 싶은 갈증에 불타고 있다(1896.6.24)."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는 트라피스트 수도회(Trappist)에 입회했으나 더 고독하고 가난한 삶을 살고 싶어하는 나자렛 열정에 몸살을 앓았다. 수도원을 떠나 클라라수도원에서 3년간 허드렛일을 한 그는 1901년 사제품을 받은 뒤 가장 버림받은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결국 사하라 타만라세트(Tamanrasset)에 정착해 유목민들의 친구이자 형제가 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1916년 한 원주민이 쏜 총에 맞아 눈을 감았다. 그가 남긴 '영적 수기'는 현대인의 심금을 울리고 있으며 "금세기에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하나님 사람"이란 칭송을 이끌어내고 있다.
 
그는 예수처럼 세상 한가운데서 가난한 사람들과 단순하게 살고 싶어했다. 그래서 수도복도 벗어 던졌다. 또 초대교회처럼 작고 단순한 공동체를 원했다. 세속에서 살되 세속에 물들지 말고, 활동을 하되 관상적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하느님 뜻에 단순하게 자신을 내맡기라는 가르침을 삶을 통해 전해줬다.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와 예수의 작은 형제회 회원들은 이 같은 영성을 따라 평복 차림으로 가난한 이들과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께 온전한의탁의 기도
 
다음은샤를르 드 푸코의 하나님께 스스로를 내어 맡기는 기도이다.
 
Mon Pere
Mon Pere, je m'abandonne a toi.
 
Fais de moi ce qui te plaira.
Quoi que tu veuilles faire de moi,
je te remercie.
 
Je suis pret a tout, j'accepte tout
pourvu que ta volonte
se fasse en moi,
et en toutes les creatures.
 
Je ne desire rien d'autre, mon Dieu.
Je remets mon ame entre tes mains,
je te la donne mon Dieu,
avec tout l'amour de mon coeur,
 
parce que je t'aime
et que ce m'est un besoin d'amour de me donner,
de me remettre entre tes mains sans mesure
avec une infinie confiance, car tu es mon Pere.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맡기오니 좋을실대로 하십시오.
 
저를 어떻게 하시든지 감사드릴뿐,
저는 무엇에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저와 모든 피조물 위에 이루어진다면
이 밖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내 영혼을 당신 손에 도로 드립니다.
당신을 사랑하옵기에 이 마음의 사랑을 다하여
하느님께 내 영혼을 바치옵니다.
 
당신은 내 아버지시기에
끝없이 믿으며 남김없이 이 몸을 드리고 당신 손에 맡기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저의 사랑입니다.

※ 참고문헌: 1. 『사하라 사막의 성자샤를르 드 푸코』
                          미셀 카루즈(Michel Carrouges) , 박갑성 역, 성바오로출판사(1966년 발행)
               2. 『평화신문』 847(2005.11.20발행), 815(2005.03.27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