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국산(水道局山) 달동네박물관이 2005년 10월 근현대 생활사 전문 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1960~1970년대
달동네 서민의 생활상을 직접 보고 체험할 수 있는 이곳은 어디서 그러모았는지 모를 자료를 쌓아 놓은 그저 그런 박물관이 아니라, 박물관이 소재해 있는 바로 이 자리에 있었던 달동네 주민들이 자신들 삶의 기록을 모아 만들어졌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달동네는 높은
산자락에 위치해 달이 잘 보인다는 뜻으로 ‘달나라 천막촌’이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도심에서 쫓겨난 판자촌 주민들이 정부가 정한 지역에 임시 천막을
치고 살면서 방에 누우면 밤하늘의 달과 별이 보인다고 해서 이렇게 불렀다. ‘달동네’라는 용어가 널리 쓰인 것은 1980년 TV 일일 연속극 〈달동네〉 방영 이후이다. 어려운 처지에서 보듬고
살아가는 달동네 사람들의 애환을 그린 이 연속극이 큰 인기를 누리면서 이후 달동네는 빈민촌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 시절은 온
나라가 허리띠를 졸라 매던 시절이었다. 굶기를 밤 먹듯 해서 세끼 배부르게 먹을 수만 있다면 원이 없겠다던
가난한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어르신들은 “그래도 그때가
좋았지”하고 그 시절을 추억한다. 어려웠지만, 이웃 간의 끈끈한 정이 있었고 더불어 나누던 공동체의 미덕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다. 손자의
손을 잡고 나들이 나온 노인부터,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중년, 영화
속에서만 보았던 모습을 신기해하는 학생들까지 이곳 달동네박물관을 찾는 이들은 다채롭다.
수도국산(水道局山)은 인천광역시 동구 송현동과 송림동에 걸쳐 있는 산이다. 수도국산(水道局山)의
원래 이름은 만수산(萬壽山)
또는 송림산(松林山)으로 이 주변 일대가 매립되어 바다가 땅으로 변하고 공장이
지어지고 사람들이 몰려들기 전에는 이 자그마한 언덕은 바닷가의 조용한 소나무 숲이었다.
송림산이 수도국산으로
산이름이 바뀌게 된 데에는 근대 개항 기 인천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 인천은 본래 우물이 적을 뿐 아니라
수질 또한 나빠서 개항 이후 증가한 인구와 선박으로 물 확 보가 큰 고민이었다. 일제 통감부의 강압에
의해 한국정부는 1906년 탁지부(度支部)에 수도국(水道局)을 신설하고 인천과 노량진을 잇는 상수도 공사에 착수하였다.
1908년에 이 산의 정상에 서울 노량진과 인천 송현동을 잇는
송현배수지가 완공되면서 이곳의 이름이 수도국산이 되었다. 결국 ‘수도국산’이라는 명칭은 이 곳에 수돗물을
담아두는 배수지(配水池)를 설치하면서 생겨 난 것이었다.
수도국산 주변은
인천의 대표적 빈민가였다.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은 일본인에게 상권을 박탈당하고 중국인에게는 일자리를 잃고
인천 동구 송현동, 송림동과 같은 신설 마을로 찾아 들었다. 비탈진
소나무 숲은 가난한 사람들의 보금자리로 변모하였다. 이어 한국전쟁(6.25)으로
고향을 잃은 피난민들이 대거 몰려 들었으며, 1960~70년대에는 산업화와 함께 호남, 충청지역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모여들었다. 산꼭대기까지
점차 작은 집들이 들어차면서 마침내 181,500㎡(5만5천여평) 규모의 수도국산 비탈에 3천여
가구가 모둠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 결과 수도국산은 인천의 전형적인 달동네가 되었던 것이다. 수도국산 달동네는 1990년대 중반부터 송현동, 송림동 일대가 개발되면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2000년대에 와서
달동네는 완전히 사라졌고, 산비탈을 깎은 터에는 대형 아파트 단지가 조성됐다. 하지만 당시 이곳 달동네에서 가난과 아픔을 서로 위로하던 모습들은 수도국산 꼭대기 공원 내에 지어진 달동네박물관에
남겨지게 됐다.
달동네는 높은
산비탈에 자리해 저 아래가 아득히 내려다 보였다. 달동네 주변에는 예부터 재래시장이 성행하였고, 골목 입구부터 구멍가게, 연탄가게,
복덕방, 이발소 등의 자그마한 가게들이 올망졸망 연이어 있었다. 퇴근길 연탄가게에서 새끼줄에 꿴 연탄 한 장 사고, 구멍가게에 들러
봉지 쌀 한 줌 사서 그렇게 하루를 견디어 갔던 달동네 사람들… 달동네는 좁은
땅에 여러 사람들이 살다 보니 수도나 화장실은 공동으로 사용하곤 했다. 이른 아침마다 공동화장실에 줄을
서서 앞사람을 재촉하던 모습은 달동네라면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에는
이곳이 재개발되기 이전 주민이었던 이들의 흔적을 고스란히 만날 수 있다. 폐수 수집가 맹태성(1917.02.27~2000.04.06)씨는 송림동에서 살면서 1960년대
인천(조선)기계제작소에서 일했다. 퇴직 이후 돌아가시기 전까지, 수문통 일대를 청소하고 송현동 주변
폐지를 주워 어려운 이웃을 돕는 선행을 베푸는 등 많은 사람의 귀감이 되었다. 연탄가게 주인 유완선(1936.03.03~)씨는 수도국산 달동네가 사라질 때까지 지게로 연탄을 배달한 사람이다. 한 장에 4Kg가량인 연탄 25장을
등에 지면 이내 숨이턱까지 차올랐다. 고지대라는 이유로 가게에 연탄을 대 주지 않아 공장까지 찾아가
항의를 하곤 했는데, 재개발 이후 용인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다.
달동네박물관에
식당은 따로 없지만, 매점이 하나 있고, 박물관 주변 공원
안 벤치나 잔디밭에서 도시락을 먹을 수 있다. 주변에는 화도진공원, 월미산
전망대, 배다리 헌책방거리, 북성동 차이나타운, 스페이스 빔 등의 명소도 즐비하다.
※ 송현 배수지 제수변실
1908년 제작된 송현배수지 제수변실은 원통형 콘크리트 구조로서 제수벨브(배수관의 단수, 유압조절)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1905년 일본인이 서울과 인천 사이의 상수도 건설계획을 추진하여 경인수도 설계를 완성했다. 이 설계도에 의하면 수원지(水源池)는 한강 연안의 노량진 일대이고 급수지역은 서울, 용산, 인천지역이었다. 이에 따라 송현배수지는 1906년 11월에 착공하여
1908년 준공되었으며 1910년 10월에 노량진
수원지 정수시설을 준공해 노량진~인천 사이에 32.62㎞의
수도관을 부설하고 같은 해 12월 10일부터 급수를 시작했다고
한다.
송현배수지는 부지면적
36,780㎡이고 5,000㎥ 저수조 3개를
갖추고 있으며 현재 이곳에서 급수받는 지역은 동구 일원과 중구 일부 지역이고 저수능력은 20,000톤으로
준공 당시와 비슷한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