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December 18, 2010

색채 마술사, 색채 시인 '마르크 샤갈(Marc Chagall)'에 대하여 (2)

샤갈이 태어난 1887년 현대 세계의 급박한 흐름은 러시아 비테프스크(Vitebsk)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그 도시의 하시디즘(Hasidism) 유대인들은 세상이 그들을 피해가는 것에 만족했다. 그들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학살과 탄압을 당하느니 눈에 띄지 않은 곳에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었다.
비테프스크는 러시아 지방의 중심지로 여러 가지 편의 시설을 갖춘 곳이었다. 그곳에는 기차역과 돔을 가진 예배당이 있었다. 샤갈의 가족은 다른 곳으로 이사 가거나 하지 않고 오로지 전형적인 유대인의 시골 마을을 닮은, 꼬불꼬불한 길이 있는 그 동네에서 고집스럽게 살아왔다. ‘모이셰 샤갈(Moishe Hatskelev Shagal; Marc Zakharovich Chagall 의 원래 이름)’은 이렇게 촘촘하게 짜인 세계에서 아홉 아이 중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청어상인, 어머니는 집에서 야채를 파는 상인이었다.


샤갈은 어릴 적부터 미술에 소질을 보였는데, 가족들은 그 사실에 당황했다. 그들에게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있는 세계, 즉 극소수 부자들만 누릴 수 있는 세계가 화성만큼이나 멀고 생소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샤갈의 어머니는 그런 그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그녀는 그를 지방의 왕립학교(이곳은 유대인의 입학이 금지되어 있었다)에 넣기 위해 뇌물을 썼다.


그 다음에는 그를 그 지역 미술학교에 입학시켰다. 1907년 젊은 모이셰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났다.

그는 그곳에서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왕립미술학교에 입학했고, 유대인에게 요구되는 주거 허가증도 받았다(허가증이 기한 만료가 된 후 그는 경찰에 잡혀가 구타를 당한 후 2주 동안이나 감옥에 갇혔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3년을 지낸 후, 샤갈은 당시 붐이 일고 있다는 새로운 예술을 구경하기 위해 파리로 떠났다.

1910년 가을 파리에 도착한 그는 즉시 도시와 사랑에 빠졌다. 그는 재빨리 프랑스식 이름을 만들었다.


바로 마르크 샤갈(Marc Chagall)’이었다. 그의 이름은 원래 '모이셰 하츠켈레프 세갈(Moishe Hatskelev Shagal)'이었으나, 유대인 학교를 다닐 때 아버지가 그의 성을 큰 걸음이라는 뜻의 샤갈(Chagall)’로 바꾸었으며, 프랑스에서 샤갈이 자신의 이름을 프랑스식으로 '마르크 샤갈(Marc Zakharovich Chagall)'로 바꾸게 된 것이었다.

그는 특히 프랑스의 종교적 자유를 부러워했다. 그곳에서는 아무도 그에게 주거 허가증을 보자고 하지 않았다. 그는 야수파의 색채와 입체파의 평면을 실험해 보았지만, 그의 상상은 언제나 자신이 유년기를 보낸 세계로 되돌아왔다.

비테프스크의 꼬불꼬불한 거리와 유대인들의 작은 예배당. 샤갈은 야수파와 입체파의 그림을 자신의 목표에 맞게 변화시켰다. 그리하여 탄생한 작품이 『나와 마을(I and the Village, 1911)』이다.

그림 속에는 환한 빨강, 초록, 파랑의 색채로 그려진 순한 눈망울의 소가 한 남자의 눈을 응시하고 있다. 그 마을에서는 사람과 동물이 조화를 이루며 산다. 그 장면은 몽환적이면서도 암시적이다.두 생명체 사이에 나란히 자리 잡은 집들은 비테프스크의 거리를 환기시킨다. 그 중 집 두 채는 거꾸로 서 있다.

『샤갈 작품의 문화적 세계』

샤갈은 전통에 대하여 깊은 사랑과 관심을 지녔지만, 항상 단순한 중재자 역할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전의 경험과 문화적 기억에 대한 해석자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전위적인 새로움을 수용하는 그의 능력은 철저히 개인적이었다. 그는 파리에서 처음 전위 미술을 경험했을 때 그것의 분석적인 접근 방식, 즉 문화적인 배경을 말끔히 지워버리고 무()의 상태에서 새롭게 출발하려는 과학적인 정신의 틀을 거부했다. 그가 비테프스크(Vitebsk) 미술 학교의 교장으로서 말레비치(Kazimir Severinovich Malevich, 1878.2.23~1935.5.15)나 리시츠키(Elizar Lissitzky, 1890.11.10~1941.11.30)와 충돌했던 점들은 이러한 사실을 증명한다.
샤갈은 그가 태어난 나라의 상징주의적 전통을 거듭 재확인 했다. 그는 그의 민족이 보유한 위대한 신비에 전위적인 예술적 자유를 투사하고자 했으며. 동부 유럽의 유태 문화 전통을 보편적인 시각 언어로 재해석하고자 했다.
또한, 샤갈은 성경의 이야기들을 열렬히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우상 숭배에 대한 전통적인 반감에 의해 다소 완화된 감각으로 다루었다고 한다. 물론 본인은 이러한 범주에서의 평가에 대해서는 찬성의 표를 과감히 던지지는 못하겠다. 왜냐하면 성경의 이야기를 소재로 다룬 그의 작품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기엔 다소 어두운 그림자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샤갈은 "내가 천사의 날개를 그릴 때. 그것은 동시에 불꽃이고 생각이며 또는 욕망이다... 형상 자체에 대한 숭배는 사라져야 한다... 나를 개별적인 상징들로서가 아니라, 형태와 색채, 그리고 세계에 대한 상상으로 판단하라... 하나의 상징은 출발점이 아니라 귀착점이어야 한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는 본인이 알고 있는 성서를 해석하는 방법과는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샤갈의 작품세계를 형성하게 하는 그의 문화적 세계의 가장 큰 특징은 자신이 경험한 문화적·예술적 전통들에 대한 관계에 절대적 순응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과거 경험한 자신만의 문화적 특이성을 한결같이 자신의 작품 형태와 주제에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러시아 혁명이 발발한 직후 샤갈은 프롤레타리아(Proletarian) 화가는 그 자신과 자신의 재능이 사회에 속하는 것임을 확실하게 안다고 말했으며, 그가 후에 러시아를 떠났고 자신의 환경에 큰 변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이러한 자신이 한말을 번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철학은 세계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변혁이다라는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5.5~1883.3.14)의 말처럼 샤갈은 세계를 변화하는 것 또는 변화해야 할 것으로 파악한 것이라 해석된다. 샤갈의 눈에는 아방가르드(Avantgarde)의 자기 몰입은 어리석은 짓으로 보였을 것이다.

결국 샤갈이 급진적인 아방가르드 형식적 자기 몰입을 거부하고 자신의 문화적 근원과 종교적 배경을 재확인하는 작업을 한 것은 그가 흔히 말하는 회피신비주의로의 피신이 아니라 그의 주변 세계를 포용하는 것이라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샤갈의 예술적 의식, 사랑』


샤갈이 그의 작품 속에서 포용한 세계는 여러 층으로 나타났다.


먼저, 무엇보다도 그가 포용한 세상은 물리적으로 나타났는데, 그의 손과 재료와의 상호 연관과, 두터운 임파스토(Impasto; 채료를 두껍게 칠하기)를 통해서 새로운 매체에 대한 지속적인 실험과 장식성을 고려한 창조 작업을 예로 들 수 있다.
또한 그의 작품의 세계는 독자적인 개인성으로 나타난다그가 사랑에 대해 끊임없이 언급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여인, 동물, 사람들에 대한 이미지를 보편적인 변형 에너지의 근원으로 삼은 방식은 매우 독특함을 선사해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의 작품이 추구하는 세계는 공공적인 성격을 나타낸다는 것이다서커스, 극장, 기도와 같이 대중들과 함께 하는 행사들을 찬양한 점에서 그것은 공공적인 성격이라 할 수 있겠다.

주변 세계를 감싸 안고자 하는 샤갈의 열망은 대중에게 항상 쉽게 이해된 것만은 아니지만 그를 20세기 미술사에서 가장 인기 있는 화가가 되게 한 것이라 생각된다.

『파리인 아방가르드』

1910년 한 후원자가 샤갈이 파리로 이주하도록 도와주었다. 다음해 샤갈은 보지라르 거리(Rue de Vaugirard) 예술가 거주 지역인 '라 뤼슈'(La Ruche)에 작업실을 정하고 이사하였으며, 1914년 파리를 떠날 때까지 이곳에서 생활을 했다.
그는 이곳에서 파리의 전위 예술가들, 특히 시인 블레즈 상드라르(Blaise Cendrars, 1887.9.1~1961.1.21),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8.26~1918.11.9)와 화가 섕 수틴(Chaim Soutine, 1893.1.13~1943.8.9), 페르낭 레제(Joseph Fernand Henri Léger, 1881.2.4~1955.8.17), 로베르 들로네(Robert Delaunay, 1885.4.12~1941.10.25) 등과 친분을 맺었다.


이와 같은 새로운 환경의 영향은 곧 그의 작품에서 나타났다.


1911년 작품 『나와 마을(I and the Village), 1912년 작품 『시인 또는 3시 반(The Poet, or Half Past Three, 1911~1912)』 등에서 벌써 이전의 순진한 사실주의와는 다른 구성적 특징, 야수주의의 색채 사용 방식, 그리고 입체주의나 오르피즘(Orphism; 20세기 초반에 일어난 회화운동)에서의 혁신적인 공간 처리 방식에 동화된 변화가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샤갈은 형식과 색채에 대한 전위적인 실험에도 불구하고 그의 개인적인 도상학적 세계를 벗어나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세계는 백러시아(White Russia; Belarus)의 풍경, 농민들의 생활 정경, 유태인의 의식들과 같은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 사랑하는 인물들에 대한 추억들로 그의 작품 속에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915년 그와 결혼한 비테프스크 출신의 젊은 여인 벨라 로젠펠드(Bella Rosenfeld)에 대한 작품 속 언급은 좋은 예라 할 수 있겠다.

『샤갈의 여자들 ··· 작품 영감의 80%는 아내 벨라』

샤갈 곁에는 모두 다섯 명의 여인이 있었다. 장남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어머니(Felga Ita)는 아들 곁에 벨라(Bella Rosenfeld; 1909년 첫만남, 1915년 결혼, 1916년 딸 이다 출생)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곧 눈을 감았다.
병약한 벨라가 망명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을 때 샤갈은 캔버스들을 벽을 향해 돌려놓고 생애 처음으로 붓을 놓고 만다.

이후 샤갈의 아들을 낳은 버지니아(Virginia Haggard Mc Neil)는 벨라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샤갈을 떠나지만(1945~1952), 1952년 당시 60세인 샤갈은 유대인 여성 발렌티나 바바 브로드스키(Valentina Vava Brodsky)와 재혼을 하게 되면서 전 아내 벨라가 죽은 뒤 8년 만에 다시 활력을 찾게 된다. 꾀가 많은 바바는 샤갈의 배후에서 강력한 아트 딜러(Art Dealer)의 역할을 했다고 한다.
벨라가 낳은 딸 이다(Ida Chagall)는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했을 때 샤갈을 먼저 미국에 보내고 아버지의 그림들을 지켜 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지만, 자신이 아버지에게 소개해 준 바바의 영향력에 밀려 화가의 꿈도 펴지 못한 채 알코올중독자가 되는 처지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주목할 점은 샤갈의 예술 세계의 중심에는 항상 벨라(Bella Rosenfeld)가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작품 영감의 80%는 아내 벨라로부터 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버지니아(Virginia Haggard Mc Neil)와 종착역 바바(Valentina Vava Brodsky)와의 정열적인 사랑, 그리고 샤갈의 유일한 딸 이다(Ida Chagall)의 내조가 그의 작품 세계를 도왔다고 할 수 있겠다.
1887년 러시아 변방 유대인 빈민촌인 비테프스크에서 태어난 샤갈은 시골 미술학교를 거쳐, 1907년 상트페테르스부르크(Saint Petersburg) 왕실 미술학교에서 거장들의 걸작을 연구하고 화가로서 첫 작품인 『죽은 자(The Dead Man, 1908)』를 발표한다. 이 작품은 인간의 무의식적인 삶과 죽음에 대한 강박을 풀어낸초기 걸작으로, 사실주의 전통을 배제하면서도 인생의 부조리한 이야기를 담아냈고, 프로이트(Sigismund Schlomo Freud)의 심리학 시대를 예고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던 그가 1909년에 자신의 작품세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연인 벨라(Bella Rosenfeld, 1895~1944)를 만나게 된다.
샤갈은 의사의 딸 테아(Teja Brachman)를 사귀던 중 그녀의 집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그녀의 친구 벨라를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지게 된다. 벨라는 그 순간을 테아는 숨쉬기가 힘든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두 눈 속에서는 불꽃이 너울거렸다. 무슨 일이니? 내가 너에게서 뭘 빼앗은 거니?”라고 미안해 했었다. 벨라는 러시아 전체에서 네 명의 최우수 학생 가운데 하나였으며, 러시아 여성 가운데 3%만이 입학이 가능했던 모스크바의 게리에르(Guerrier) 여자대학교(당시 Moscow University for Women or Moscow Higher Women's Courses; 1900~1918, Moscow State Pedagogical University; 1990~)에 들어간 수재였다. 보수적인 유대인촌에서 이 젊은 커플(부유한 보석상의 막내딸인 벨라와 가난한 청년 샤갈)은 큰 화젯거리였다. 벨라는 샤갈이 혼자 머무는 초가집에 매일 찾아가 사랑을 키워갔으며, 샤갈은 더 이상 테아를 그리지 않았고, 벨라의 영향으로 그녀에게 고전적인 기품을 부여한 『검은 장갑을 낀 약혼녀(My Fiancée with Black Gloves, 1909)』를 그렸다.
샤갈은 벨라와 결혼하는 1915년에 그렸던 그 유명한 『생일(The Birthday, 1915)』을 시작으로 이후 《아름다운 연인들》 연작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샤갈은 많은 초상화에서 벨라를 연인으로, 아내로, 산모로 등장시키면서 작품에 아름다움을 더했다. 그의 1917년 작품 『흰 깃옷을 입은 벨라(Bella with White Collar)』를 보면 화면 전체를 차지하고 서 있는 벨라의 아래에 샤갈과 그의 딸 이다가 조그맣게 그려진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샤갈의 중심에 벨라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또 『비테프스크의 누드(Nude over Vitebsk, 1933)』에서 그림 위쪽에 솟아 있는 벨라는 다른 사물보다 유독 큰 형상으로 표현되어 있고, 『땅거미 질 무렵(Hour between Wolf and Dog, 1938~1943)』에서는 화가 샤갈이 팔레트를 손에 들고 사랑하는 벨라에게 밀착되어 결코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샤갈은 벨라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와 같이 할 운명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나의 삶(1931)』이라는 자서전을 통해서 벨라와의 첫만남을 "그녀의 침묵은 나의 것이었고, 그녀의 눈동자도 나의 것이었다.


그녀는 마치 나의 어린시절과 부모님, 나의 미래를 모두 알고 있는 것 같았고, 나를 관통해 볼 수 있는 것 같았다("Her silence is mine, her eyes mine. It is as if she knows everything about my childhood, my present, my future, as if she can see right through me.").”라고 소개했다.

이렇듯 샤갈에게 있어서 벨라는 처음 만날 때부터 이미 특별한 존재였으며 그의 작품 세계를 채워가는 힘이 되었다.

벨라는 샤갈에게 있어서 단순히 아름다운 뮤즈(Muse,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學藝의 여신)가 아니었다.

샤갈은 오랫동안 그녀의 사랑은 나의 예술을 채워왔다라고 자주 말해왔으며, 『나의 삶』이란 자서전에서 그녀는 다른 세계에서 온 것 같다.

그녀는 누구일까? 나는 두렵다. 아니,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서 그녀 곁에 있고 싶다.

그녀의 침묵은 나의 침묵, 그녀의 눈은 나의 눈이고 나의 영혼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자신에게 있어서 벨라의 의미를 표현했다.

또한, 샤갈 그가 아무리 문화적으로 빈곤한 고향 마을에서 벗어나려고 했어도, 그의 예술적 원천은 러시아 유대인촌과 상트페테르스부르크에서 흡수한 러시아 문화였다 에게 있어서 벨라는 샤갈의 예술 원천인 러시아 유대인 촌과 상트페테르스부르크에서 흡수한 러시아 문화가 구체화된 존재였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러시아에서 태어난 샤갈이 프랑스와 미국에서 망명자로 살면서 가족과 연락할 수도 없고, 결코 조국에 발을 들여 놓을 수도 없을 때에도 유대인으로서, 그리고 러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지탱 시켜 준 것이 바로 아내 벨라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샤갈에게 벨라가 유대인의 러시아가 구체화된 존재였음을 벨라는 누구와도 같지 않았다. 그녀는 구름과 나무와 집들과 더불어 드비나 강(Dvina River)에 비친 비테프스크 언덕 위의 다람쥐였다.”라는 샤갈의 회상이 대변해준다.

갈에게는 유대 예술의 뮤즈였던 벨라가 망명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그는 극도의 상실감에 빠지게 된다. 샤갈이 캔버스들을 벽을 향해 돌려놓고 생애 처음으로 붓을 놓고 방황할 때, 그를 위로한 여인은 딸 이다의 친구 버지니아였다.
버지니아는 샤갈의 가정부로 들어가서 그를 위로하고 마침내 은밀한 부부 사이가 되어 아들 데이비드를 낳았지만, 벨라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샤갈을 결국은 떠나게 된다.

『꽃다발과 하늘을 나는 연인들(Bouquet with Flying Lovers, 1934~1947)』을 보면 샤갈과 버지니아의 초기 열정적인 사랑이 잘 나타나 있다.

샤갈의 마지막 사랑은 유대인 여성 발렌티나 바바 브로드스키(Valentina Vava Brodsky), 1952 60세의 샤갈은 그녀와 재혼을 하면서 전 아내 벨라가 죽은 뒤 8년 만에 다시 활력을 찾게 된다.

샤갈이 내 아버지가 청어를 운반하고 있을 때 키예프(Kiev)의 브로드스키 가문은 틴토레토(Jacopo Tintoretto, 이탈리아의 화가, 대표작: 최후의 만찬)의 작품을 사들이고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듯이 그의 마지막 연인 바바는 좋은 가문의 여자였다.

벨라를 제외한 샤갈의 두 명의 여자는 모두 아버지의 전적인 내조자 딸인 이다의 소개로 이루어졌다.

사실상 이다는 벨라의 후임자로서의 역할을 했는데, 샤갈에게는 어떠한 존재였는지 “1934년 내 딸, 이다는 18세의 나이로 그녀보다 몇 살 연상인 변호사와 결혼했다. 그러나 왠지 내 마음은 기쁘지만은 않았다.”라는 샤갈의 말이 왠지 의미심장하고, 여러 가지 해석을 낳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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