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December 23, 2010

색채 마술사, 색채 시인 '마르크 샤갈(Marc Chagall)'에 대하여 (3)

샤갈의 그림은 찬사를 받았다. 그는 1914년 여름 비테프스크(Vitebsk)를 방문했다.

진정한 금의환향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샤갈은 신문을 읽어보지 않았을까? 신문을 읽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그는 완전히 공포에 사로 잡혔다. 비테프스크와 프랑스 사이에 놓인 두 개의 전선으로 인해, 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고향에 머물러야만 했다.

다행히 그는 비테프스크에서 약간의 위안거리를 찾을 수 있었다. 바로 벨라 로센펠드(Bella Rosenfeld)라는 미모의 아가씨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녀는 지역의 부유한 보석상의 딸로, 두 사람은 1909년에 만나 사랑에 빠졌지만 샤갈이 프랑스에 가 있는 동안 서로 만나지 못했다.

두 사람은 다시 연애를 시작했고, 1915년 여름 결혼식을 올렸다. 1916년 딸 이다가 태어났다. 그런 다음 혁명(1917‘2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10월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 났다.

샤갈은 기대에 부풀었다. 특히 소련 정부 하에서 유대인들이 처음으로 동등한 권리를 보장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혁명 정부가 혁명적 미술을 반길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입체파와 미래파, 그리고 다른 모더니스트들의 예술까지 포함하게 될 거라고 예상했다.

처음에는 그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되는 것처럼 보였다. 1918년 샤갈은 비테프스크 지방의 공산당 미술위원으로 임명되자 즉시 진보적인 미술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하지만 그는 러시아 미술을 장악하고 있던 혁명적인 교조주위를 기꺼이 용인하지 못했고, 아카데미 내부에서 정치적인 압력과 결합된 내분이 일어나자 그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샤갈 가족은 모스크바로 이주했고, 그는 모스크바 유대인 국립극장(Moscow State Yiddish Theater)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그는 그곳에서 총 일곱 점의 기념비적인 내부 장식화를 그렸다.

1920년 제작된 《유대인 예술극장 장식화(Decoration of the Jewish Theatre)》가 바로 그것으로 가로 787, 세로 284 크기의 캔버스에 그려진 대형 작품인 『유대인 예술극장 소개(Introduction to the Jewish Theatre)』와 『결혼 피로연 테이블(Wedding Table), 『무대 위의 사랑(Love on the stage), 『문학(Literature, 81.3X216), 『연극(Drama, 81.3X216), 『음악(Music, 107.8X213.3), 『무용(Dance, 103.2X212.5)』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장식화이다.

현대와 고대, 유대인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의 충돌을 보여주는 내부 장식화라고 평가되는 샤갈의 《유대인 예술극장 장식화》를 살펴 보면 유대교의 뿔피리를 부는 사람 옆에서 음악가들이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천사들의 피리소리에 맞춰 댄서들이 춤을 추며, 십계명이 화가의 팔레트 근처를 날아다닌다.

『음악(Music, 1920)』이라는 제목의 내부 장식화를 보면, 거대한 초록색 얼굴의 바이올린 연주자가 유대인 시골 마을의 지붕 위에 서 있다.

그러나 샤갈은 돈을 한 푼도 받지 못하고 곧 강제로 유대인 고아원에 나가 미술을 가르치는 일을 해야 했다. 그 직업 또한 무보수였지만 적어도 음식과 숙소는 제공되었다.

소련 정부가 자신에게 아무런 미래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샤갈은 리투아니아로 가서 전시회를 열 계획을 세운다.

그는 러시아를 떠난 덕에 간신히 목숨을 건진 셈이다. 스탈린 치하에서 유대인 지식인들의 운명은 불길했기 때문이다.

『비테프스크로의 귀향』

샤갈이 자신의 문화적 근원을 특수한 전위적 장식으로 해석한 작업들은 그가 비테프스크로 귀향하는 1914년까지 파리와 베를린에서 지속적으로 전시되었다. 고향을 잠시 방문하려던 그의 기대는 빗나가, 1차 세계대전과 잇따른 러시아 혁명에 의해 그는 8년이라는 기간을 비테프스크(Vitebsk), 페트로그라드(Petrograd, 1914~1924; Leningrad, 1924~; Saint Petersburg, 1991~), 모스크바(Moscow) 등지에 머물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샤갈은 좀더 개인적인 시도에 열중하였으며, 그의 전위적인 실험들은 완화되었다. 비록 샤갈은 원칙적으로 혁명에 공감하는 입장을 취했고, 또 그의 명성으로 인해 모스크바 문화부 조형 미술 책임자로 위촉 받게 되었지만, 그는 비테프스크에 머물면서 지역 미술 학교의 교장으로서, 그리고 미술 위원으로서 일하기를 선호했다. 하지만 샤갈은 동료들, 특히 그의 '전통주의'에 과격하게 반대하는 말레비치(Kazimir Severinovich Malevich, 1878.2.23~1935.5.15), 리시츠키(Elizar Lissitzky, 1890.11.10~1941.11.30)와 갈등을 일으키게 되며, 1920년에 샤갈은 그의 직분을 사임하고 모스크바로 이주하여 무대 장치가로서, 그리고 고아들을 위한 드로잉 교사로서 일하였다.

『샤갈 작품 세계의 빛과 그림자』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고국으로 돌아와 8년간 우울하게 보내던 샤갈은 1922년 결국 러시아를 떠나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그로부터 1년 후 그는 파리로 다시 돌아갔으며 그곳에서 프랑스에 귀화를 하게 된다.

파리에서 샤갈은 화상(畵商) 앙브루아즈 볼라르(Vollard Ambroise, 1866~1939)와 초현실주의자들을 알게 되었으며, 매우 풍부한 결실의 시기를 맞게 되었다. 그는 볼라르를 위해 성경을 포함한 책들의 삽화를 그려주기도 했다. 또한 이 기간 동안 샤갈은 여러 전시회에 참여하였으며, 프랑스 각지와 이집트, 팔레스타인, 네덜란드, 이탈리아, 폴란드 등을 포함한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작품 활동을 지속했다.

1931년에는 샤갈의 자서전인 『나의 삶』이 출판되었고, 1933년에는 그의 회고전이 바젤 미술관(Kunstmuseum Basel)에서 열렸다. 이러한 기회를 통해 그는 유럽의 예술가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보장받게 되었다.
샤갈은 1932년의 유럽이 1914년에 경험한 유럽보다 훨씬 어둡게 변모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이전에 베를린의 그림 상인인 헤르바르트 발덴(Herwarth Walden, 1879.9.16~1941.10.31)에게 그림 40점을 남겼다. 그 후 발덴은 부지런히 그림을 판매했지만, 거기서 얻은 적은 돈은 전후의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푼돈 수준으로 줄어들고 말았다. 게다가 발덴은 교묘한 속임수까지 부리고 있었다. , 샤갈의 그림 몇 점을 자신의 전처 집에 숨겨 놓았던 것이다. 샤갈은 그림을 돌려받기 위해 길고 지루한 법정투쟁까지 벌여야 했다.

베를린에서 몇 달을 지낸 후, 샤갈 가족은 파리로 이사했다. 샤갈은 몽파르나스(Montparnasse)에 도착하자마자 이전에 살았던 아파트로 달려갔다. 9년 전 그곳에다 그림들을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집에는 이제 늙은 연금 수령자가 살고 있었고 그림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건물의 주인은 샤갈의 그림을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창고에 대충 쌓아 놓았다가 나중에 모두 치워버리고 말았다. 그림 하나는 그나마 생명을 얻었는데, 토끼를 기르는 상자의 지붕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가 베를린과 파리에 남겨둔 모든 예술적 성과물이 허무하게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주저 앉지 않고 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했다. 분실된 작품을 회복하려는 시도에서 작품들을 재현해서 그리거나 새롭게 창작하는 데 온 힘을 바쳤다.

샤갈 가족은 10년동안 프랑스에서 편안한 생활을 즐겼지만 곧 나치의 위협이 닥쳐왔다. 1933년 그의 그림 중 3점은 독일의 만하임(Mannheim)에서 소각되었고, 독일 박물관에 걸려 있던 그의 작품들은 타락 미술로 매도 당하면서 벽에서 제거되었다. 1937년 샤갈은 프랑스 시민권을 획득했지만 곧 독일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아내 벨라와 미리 남부로 피난을 했다.
크리스탈나흐트(die Kristallnacht) 또는 수정의 밤(die Reichskristallnacht)라 불리는 1938 11 9일 밤, 독일 전역에서 유대인들의 예배당과 집, 사무실 등이 불에 타거나 파괴되었다. 그날 밤 샤갈은 자신의 불안을 모조리 『하얀 십자가상(White Crucifixion, 1938)』에 쏟아 부었다. 유대인 화가가 그런 주제를 선택했다는 점이 다소 이상하긴 하지만, 샤갈은 예수를 기독교의 구원자가 아니라 유대인 순교자로 묘사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중심으로 무서운 광경들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집과 예배당들이 불타고, 붉은 군대가 진군해 들어오고, 유대인들은 걷거나 배를 타고 피난을 간다. 이것은 샤갈식 저항의 외침이었으며, 그가 그린 게르니카(Guernica)였다. 이 작품은 곧 닥쳐올 대학살에 대한 놀라운 선견지명을 보여준다.
당시 프랑스를 다스리던 비시 정부(Gouvernement de Vichy; 1940 6월 나치스 독일과 정전협정을 맺은 뒤 오베르뉴의 온천도시 비시에 주재한 프랑스의 친독일정부)가 강경한 반유대인 법안을 제정하자 유럽에 남으려던 샤갈 가족의 희망은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미국 원조 위원회(American Aid Committee)의 회장인 배리언 프라이(Varien Fry)와 마르세유(Marseille)에 있던 미국 집정인 해리 빙엄(Harry Bingham, 1903.6.17~1988.1.12)이 샤갈 가족을 위해 용감하게 여권과 비자를 만들어준 덕분에 일가족은 강제수용소 행을 면할 수 있었다. 샤갈 가족은 배를 타고 미국으로 떠나 1941 6 23일 뉴욕 항에 도착했다. 독일이 러시아를 침공한 바로 다음 날이었다.

『샤갈 작품 속의 소재들』

미국으로 이민가는 것에 불안함을 느꼈던 마르크 샤갈은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미국에도 소가 있나?… 소가 있다면 그리로 갈게···

파리가 함락된 후 샤갈의 삶은 일촉즉발의 위기에 부닥쳤다. 비시 정권 아래서 독일인 부역자들이 그를 강제수용소에 보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샤갈은 도망치기를 간절히 열망했지만, 한편 미국으로 가는 것도 두려워했다. 그는 출발하기 전에 배리언 프라이(Varien Fry)에게 미국에도 소가 있나?라는 질문을 반복했다고 한다.

이러한 샤갈의 질문은 어떤 면에서 보면 지독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그러기엔 너무 단순한 감이 없지 않다. 샤갈은 사실상 내가 미국에 가서도 그릴 만한 소재가 있을까? 혹은 내가 미국에서 그림을 그릴 수나 있을까?를 물었던 것이다.

갈이 미국에서 가장 행복을 느끼며 보낸 곳도 농장이 많은 뉴욕 주의 시골에서 지낼 때였다고 한다. 샤갈은 뉴욕 주의 시골에서 수많은 소와 함께 다정하게 지냈다고 전한다.

실제로 샤갈의 작품 속에는 동물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여기서 그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소재들의 의미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닭은 풍요로움을 상징하며 종종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등장한다. 또한 말은 자유를 표현하는 것이고, 염소는 행복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서커스 장면은 인간과 동물의 화합을 표현한 것이고, 에펠탑은 하늘의 꼭대기 즉 자유를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유대교를 상징하는 7개의 초가 꽂히는 촛대는 유대교의 안식일, 인간의 창의성을 표현한 것이며, 창문은 창문을 통해 보이는 파리와 같이 샤갈의 자유를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 생각된다. 괘종시계는 시간을 나타내며 절제된 생활을 표현했을 것이고, 종종 누드로 표현되기도 한 여인의 가슴은 남녀간의 사랑이나 관능적인 사랑의 이미지를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암시하는 성적인 표현이며 풍요로운 삶을 의미한 것으로 판단된다. 거리의 악사는 가끔 날아다니는 물고기와 같이 표현되는데 샤갈의 아버지가 생선공장에서 일했던 것을 생각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각각의 소재를 통해 샤갈이 표현하고자 했던 의미를 생각하면서 그의 작품에 접근한다면 쉽게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갈림길』

중년의 샤갈 부부에게 뉴욕이라는 도시는 외계의 행성과 같았다. 샤갈은 로어이스트사이드(Lower East Side)에서 가장 편안함을 느꼈다. 그곳에서는 유대인의 언어로 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뉴욕 주 북부의 시골도 좋아했다고 한다. 이는 아마도 그가 태어나고 자랐던 비테프스크의 시골마을과 흡사한 풍경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었나 생각이 된다.

1944년 파리가 해방되자, 샤갈 부부는 프랑스로 돌아갈 결정을 했다. 그들은 짐을 꾸리기 시작했지만 바로 그때 비극이 발생했다. 샤갈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주던 여신이자 동반자였던 벨라가 갑자기 병균감염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다. 샤갈은 참혹한 슬픔에 빠져들었고 아내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으로 몇 년간 프랑스로 돌아가지도 못했으며, 더 이상의 미술작업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나치의 탄압과 박해를 피하여 1941년 미국 망명길에 오르게 된 일련의 사건들은 샤갈의 작품세계에 매우 중요한 변화의 징후가 되었다. 물론 이 변화는 1944년 아내 벨라의 죽음으로 더 뚜렷해졌다고 생각된다.

미국 망명길에 오르고 아내의 죽음의 충격으로 거의 일년 가량 미술 작업을 하지 않던 샤갈이 마침내 다시 작업에 임하게 되었을 때 그의 작품 속에는 커다란 변화가 나타나게 된다. 프랑스에서 활동을 하며 확고한 유럽 예술가로서 자리매김을 하던 시절의 그의 작품은 선명한 색채로 사람과 동물을 섞어, 환상적이며 신비한 그림을 그렸었는데 반해, 미국 망명 시절 이후의 작품 속에서는 이전의 밝은 색채는 어두운 색조와 우울한 효과로 바뀌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40년대 중반에 제작된 샤갈 작품의 대부분에서 그의 강한 색조와 시적인 꿈들은 악몽들로 전환된 듯한 느낌이었다.

『명성』

1945년 샤갈은 버지니아(Virginia Haggard Mc Neil)라는 이름의 젊은 여성을 만나 아들 데이비드를 낳았고 마침내 세 사람은 프랑스로 이주하게 된다. 그러나 벨라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샤갈로 인하여 버지니아와의 관계는 점차 식어갔다. 1952년 당시 60세인 샤갈은 바바라는 애칭을 갖은 활기찬 성격의 러시아 이민자이며 유대인 여성인 발렌티나 바바 브로드스키(Valentina Vava Brodsky)를 만났고, 두 사람은 그 해 말 결혼을 했다. 샤갈은 바바와 재혼을 하게 되면서 전 아내 벨라가 죽은 뒤 8년 만에 다시 활력을 찾게 되었다. 실제로 바바의 도움으로 큰 학회들과 야심적인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1948년 프랑스로 되돌아 온 샤갈은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10.25~1973.4.8), 마티스(Heinri Émile-Benoit Matisse, 1869.12.31~1954.11.3)와 동네 친구이자 경쟁자로 어울려 살았다. 2년 후 그는 생 폴 드 방스(Saint-Paul de Vence)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마지막 생애를 보냈다. 1946년부터 유럽과 미국에서는 그의 중요한 회고전들이 연속적으로 개최됐다. 그의 명성은 뉴욕(New York), 런던(London), 파리(Paris), 암스테르담(Amsterdam), 취리히(Zürich), 베른(Bern) 등의 도시에서 많은 대중들에게 알려졌으며, 그는 영구적인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됐다.
이 시기에 주목할 만한 샤갈의 작품 활동으로는 1966년에 완성된 총 17점으로 구성된 『성경의 메시지(Biblical message; Message biblique)』의 연작을 꼽을 수 있으며, 이 작품들은 1973년 건립된 니스(Nice) '마르크 샤갈 성서 미술관(Musée National Message Biblique Marc Chagall)에 전시되어 있다.
또한, 1964년에 샤를르 드 골(Charles Andr Marie Joseph De Gaulle)과 앙드레 말로(Andre Georges Malraux)의 요청으로 샤갈은 파리 오페라 극장(오페라 가르니에, Opéra Garnier; 팔레 가르니에, Palais Garnier)의 천장을 장식하였으며, 1966년에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Metropolitan Opera House)에 거대한 규모의 벽화 2점 『음악의 샘(The Sources of Music)』과 『음악의 승리(The Triumph of Music)』를 제작했다.

이외에도 샤갈의 후기 작품은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었는데, 앙리 마티스(Heinri Émile-Benoit Matisse)처럼 스테인드 글라스(Stained Glass) 작품을 만들었고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 처럼 도자기(陶瓷器, Porcelain)를 장식하기도 했다. 샤갈에게 있어서 스테인드 글라스 작품의 최대 프로젝트는 1962년 완성한 예루살렘의 하다사 대학교 의료센터(The Hadassah University Medical Center, Jerusalem)의 예배당 창문을 디자인한 것으로 열두 개의 창문에는 각각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나타내는 그림이 그려졌다. 샤갈은 1967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상연한 모차르트의 《마적(Magic Flute)》을 위하여 무대장치와 의상을 제작하기도 했다.

샤갈은 이처럼 그의 생애를 마지막으로 장식하는 기간 동안 끊임없는 경의의 대상이 되는 작품 활동을 했었다. 큰 꽃다발과 우울한 어릿광대, 날아다니는 연인들, 환상적인 동물들, 성서의 예언자들, 지붕 위의 바이올린 연주자 등의 이미지들을 묘사한 민속적인 작품들로 말미암아 샤갈은 20세기 파리파의 중요한 전위미술가들 가운데 가장 인기가 있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되었다.

샤갈은 환상적인 주제를 화려한 색과 특유의 능란한 붓질로 묘사했는데, 그의 양식은 표현주의나 입체파, 추상미술과 같은 1914년 이전의 운동들을 반영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변함없이 개인적인 성향을 띠고 있었다.

비평가들은 때때로 그의 작품 대부분에는 가벼운 감상이 깃들어 있고 작품의 질이 고르지 않으며 모티프가 지나치게 되풀이 된다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그의 작품들이 현대의 작품들에서 찾아 보기 어려운 시각적 은유의 수준에 이르렀다는 데는 누구도 동의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바이올리니스트와의 연관성』

샤갈이 유대인 극장의 벽에 그렸다는, 유대인 시골 마을의 지붕 위에 서 있는 바이올린 연주자의 이미지가 왠지 익숙하지 않은가? 그 그림은 1964년 브로드웨이에서 히트한 뮤지컬 《지붕 위의 바이올린》에 영감을 주었다. 그 제목 역시 샤갈의 그림에서 따온 것이다. 무대 디자인을 맡았던 보리스 아론슨(Boris Aronson, 1898.10.15~1980.11.16)은 러시아계 유대인이다. 그는 샤갈이 모스크바 유대인 극장의 책임 화가로 근무하고 있을 때 같은 극장에서 일을 했었다. 아론슨이 디자인한 배경 막에는 작은 집들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샤갈의 『나와 마을(I and the Village, 1911)』이란 작품에서 착안한 것이라 한다.

지붕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은 상상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유대인 시골 마을의 지붕은 나지막해서 올라가기가 쉬웠다. 홍수가 나거나 적이 쳐들어올 때면 주민들은 그곳으로 대피하곤 했다고 한다. 또한, 평상시에도 동네 사람들은 종종 지붕 위로 올라갔다고 한다. 집 아래쪽이 너무 좁아 지붕 위에서 휴식을 취했던 경우가 잦았다는 것이다. 샤갈은 어렸을 적 할아버지가 지붕 위에 올라가 당근을 씹으면서 세상이 흘러가는 모습을 내려다 보기를 즐겼던 것을 자주 회상했었다고 한다.
샤갈은 뮤지컬 《지붕 위의 바이올린》에 대해 어떤 의견을 보였을까? 파리에서 그 뮤지컬이 장기간 흥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는 뮤지컬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모스크바 유대인 국립극장에서 같이 일하던 보리스 아론슨과의 예술적 이질감에서 이었을까? 아니면 모스크바에서의 착취와 수탈에 시달렸던 고난의 과거로부터 조금은 떨어져 있고 싶어서였을까? 그 이유가 무엇이든 궁금함을 감출 길은 없다.

샤갈은 1985 3 28일 영원히 눈을 감았고, 몇 년 동안 살았던 니스 교외의 작은 마을인 생 폴 드 방스(Saint-Paul de Vence)에 묻혔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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