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1927년 5월 26일자
신문기사
재독 문학가로서
전혜린의 번역으로 국내에 유명하게 된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의
작가 이미륵(본명; 이의경,
1899~1950)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1946년 발간된 이미륵의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는 독일 문화계에 신선한 충격과 감동을 주어 한국인의
깊은 정신을 흠모하게 만들었으며, 독일 교과서에도 수록되었다.
이미륵은 경성의학전문학교에
다니던 중 3.1운동에 참여하고 일본 경찰의 수배를 피해 상해를 거쳐 독일로 망명하여 뮌헨대학에서 동물학, 철학, 생물학을 전공하고 1928년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후 학술연구회에 1931년부터
작품활동을 시작하고 1949년부터 그 대학 동양학부에서 중국학을 가르치다 1950년 51세에 위암으로 사망했다.
이미륵은 뮌헨대
재학 중인 1927년 2월
5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피압박민족회의에 한국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독일 유학생인
이극로와 이미륵, 프랑스 유학생 김법린 등이 한국대표로 참석했고, 세계여행
중이던 허헌(변호사 당시 동아일보 사장 직무대리)도 여기에
참관하였다.
한국대표단은
대회에서
▪ 하관조약을
실행하여 조선의 독립을 확보할 것
▪ 조선 총독정치를 즉시 철폐할 것
▪ 상해 대한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
※ 하관조약: 1895년 청일전쟁 후 청국과 일본이 조선을 완전 자주 독립국임을 확인한 조약
이 3개 항을 의제로 제안하기로 하고, 대회가 열리기 전날 대회 간부진에 제출하였으니, 집행부는 이 대회를 반영운동(反英運動)을 중심으로 중국, 인도, 이집트 문제만 거론하려고 하고 있었다.
본 대회 첫날인 2월 10일 이극로는 이에 이의를 제기하고, 의장단에게 조선문제를 토의하겠는가 안하겠는가 하며 강경한 말로 그들의 공정하지 못한 대회 진행을 공박하였다. 이에 의장단은 조선 문제 토의 여부를 중의(衆議)에 붙여 거수 표결하게 하였다. 그 결과 3표 차이로 부결되었다.
2월 14일 최종일 대회에서 상설기관으로 ‘제국주의와 식민지 압박을 반항하고 민족 자유를 원하는 대연맹‘을 창립하고, 영국의 린스베리(집행위원장)등 9명을 집행위원으로 선출하였다. 후에 인도 수상이 된 자와하랄 네루도 이대회에 참석하여 집행위원이 되었다.
대회집행위원회는 아시아 문제 연구와 상호 연락을 위하여 아시아 민족회를 열고 네 위원국을 선정하였다. 그 위원국은 조선, 중국, 인도, 시리아로 한국의 대표는 파리에 있는 김범린이 되었다.
‘한국의 문제’라는 자료는 이 대회에서 한국대표단이 일본의 지배하에 신음하고 있던 한국의 실정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해 만들어 각국 대표에게 배포한 것이다. 가로 15cm, 세로 23cm 갱지에 인쇄된 원본이며, 표지에는 영어.불어.독어로 ‘한국의 문제(The Korean Problem)]라는 제목 아래 원색의 태극기와 동아시아 지도가 그려져 있다. 본문은 ’KOREA'라는 제목 아래 독일어와 영어로 각각 4페이지씩 1부터 8페이지의 표시가 되어 있고, 앞뒤 안표지에는 일제 식민지 침탈상을 나타낸 도표 2페이지가 있으며, 앞뒤 표지를 포함하여 모두 12페이지짜리로 베를린의 살라드룩 운트 스타인코프(Saladruck & Steinkopf) 인쇄소에서 인쇄했다.
이 자료는 독일 뮌헨대학 생물학부 동물학과의 이미륵 동기동창생이었던 샬러(Schaller)교수가 이미륵에게서 받아 40여 년간 간직해오다 1969년경 한국에서 유학온 정규화 교수(성신여대, 독문학)에게 선사하여 1984년 7월 13일 독립기념관에 기증된 것이다. 이 문서의 표지 아랫단에 이미륵은 연필로 ‘Brussel 10 Feb 27"이라는 표기와 두 줄의 글을 독일어로 적고 Mirok(미륵)이라는 자신의 서명을 남겨 그의 체취가 이 자료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한국의 문제’의 내용은 양 안 표지에 1910년이래 1926년까지의 식민지 침탈상을 한국 내 일인 이주자 수, 토지침탈, 한국인의 생활고, 한일 지주의 자본비교, 학교교육 억압과 차별, 관료의 수와 대우 비교 등을 나타내었다.
본문의 내용은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한국은 유사 이래 독립국이었으며, 고유한 문화를 가진 나라였다.
▪ 1910년 8월 일본이 한국의 국권을 완전히 강탈하여 한국인은 끝없는 불행에 빠지게 되었다.
▪ 일인의 이주는 50만으로 증가되고, 모든 기회와 산업상의 이익을 독점하여 한국인 한가족의 연간 소득은 10파운드에 불과하게 되었다.
▪ 일본은 그들의 범죄적 활동을 감추기 위해 한국의 가장 나쁜 관습, 특수 개별적인 잘못을 일반화하여 국제사회에 선전하고, 모든 개선은 일본인의 공으로 돌린다.
▪ 학교 폐쇄, 일본어 강요, 신문과 책의 출판, 회사설립, 경제적 문화적 활동은 금지 또는 단속된다.
▪ 일본의 지배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한국인은 잔인한 보복을 받고 있다.
▪ 1919년 3월 1일 한국 학생들이 주도하여 독립을 선포했다. 이것은 최후의 단계이며, 우리는 자유를 되찾기 위해 모든 일을 다할 것이다.
▪ 무력이나 기만으로 일본은 더 이상 한국을 지배할 수 없다. 일본에 대한 투쟁만이 우리를 자유의 생명으로 인도할 마지막이자 유일한 대안이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이 자료는 일제하에서 이미륵을 비롯한 한국의 해외유학생들이 가진 우리 역사 문화에 대한 자부심,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 조국의 독립을 위해 국제적 움직임을 기민하게 포착하여 활동하고자 했던 의지와 노력을 말해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 하관조약: 1895년 청일전쟁 후 청국과 일본이 조선을 완전 자주 독립국임을 확인한 조약
이 3개 항을 의제로 제안하기로 하고, 대회가 열리기 전날 대회 간부진에 제출하였으니, 집행부는 이 대회를 반영운동(反英運動)을 중심으로 중국, 인도, 이집트 문제만 거론하려고 하고 있었다.
본 대회 첫날인 2월 10일 이극로는 이에 이의를 제기하고, 의장단에게 조선문제를 토의하겠는가 안하겠는가 하며 강경한 말로 그들의 공정하지 못한 대회 진행을 공박하였다. 이에 의장단은 조선 문제 토의 여부를 중의(衆議)에 붙여 거수 표결하게 하였다. 그 결과 3표 차이로 부결되었다.
2월 14일 최종일 대회에서 상설기관으로 ‘제국주의와 식민지 압박을 반항하고 민족 자유를 원하는 대연맹‘을 창립하고, 영국의 린스베리(집행위원장)등 9명을 집행위원으로 선출하였다. 후에 인도 수상이 된 자와하랄 네루도 이대회에 참석하여 집행위원이 되었다.
대회집행위원회는 아시아 문제 연구와 상호 연락을 위하여 아시아 민족회를 열고 네 위원국을 선정하였다. 그 위원국은 조선, 중국, 인도, 시리아로 한국의 대표는 파리에 있는 김범린이 되었다.
‘한국의 문제’라는 자료는 이 대회에서 한국대표단이 일본의 지배하에 신음하고 있던 한국의 실정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해 만들어 각국 대표에게 배포한 것이다. 가로 15cm, 세로 23cm 갱지에 인쇄된 원본이며, 표지에는 영어.불어.독어로 ‘한국의 문제(The Korean Problem)]라는 제목 아래 원색의 태극기와 동아시아 지도가 그려져 있다. 본문은 ’KOREA'라는 제목 아래 독일어와 영어로 각각 4페이지씩 1부터 8페이지의 표시가 되어 있고, 앞뒤 안표지에는 일제 식민지 침탈상을 나타낸 도표 2페이지가 있으며, 앞뒤 표지를 포함하여 모두 12페이지짜리로 베를린의 살라드룩 운트 스타인코프(Saladruck & Steinkopf) 인쇄소에서 인쇄했다.
이 자료는 독일 뮌헨대학 생물학부 동물학과의 이미륵 동기동창생이었던 샬러(Schaller)교수가 이미륵에게서 받아 40여 년간 간직해오다 1969년경 한국에서 유학온 정규화 교수(성신여대, 독문학)에게 선사하여 1984년 7월 13일 독립기념관에 기증된 것이다. 이 문서의 표지 아랫단에 이미륵은 연필로 ‘Brussel 10 Feb 27"이라는 표기와 두 줄의 글을 독일어로 적고 Mirok(미륵)이라는 자신의 서명을 남겨 그의 체취가 이 자료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한국의 문제’의 내용은 양 안 표지에 1910년이래 1926년까지의 식민지 침탈상을 한국 내 일인 이주자 수, 토지침탈, 한국인의 생활고, 한일 지주의 자본비교, 학교교육 억압과 차별, 관료의 수와 대우 비교 등을 나타내었다.
본문의 내용은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한국은 유사 이래 독립국이었으며, 고유한 문화를 가진 나라였다.
▪ 1910년 8월 일본이 한국의 국권을 완전히 강탈하여 한국인은 끝없는 불행에 빠지게 되었다.
▪ 일인의 이주는 50만으로 증가되고, 모든 기회와 산업상의 이익을 독점하여 한국인 한가족의 연간 소득은 10파운드에 불과하게 되었다.
▪ 일본은 그들의 범죄적 활동을 감추기 위해 한국의 가장 나쁜 관습, 특수 개별적인 잘못을 일반화하여 국제사회에 선전하고, 모든 개선은 일본인의 공으로 돌린다.
▪ 학교 폐쇄, 일본어 강요, 신문과 책의 출판, 회사설립, 경제적 문화적 활동은 금지 또는 단속된다.
▪ 일본의 지배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한국인은 잔인한 보복을 받고 있다.
▪ 1919년 3월 1일 한국 학생들이 주도하여 독립을 선포했다. 이것은 최후의 단계이며, 우리는 자유를 되찾기 위해 모든 일을 다할 것이다.
▪ 무력이나 기만으로 일본은 더 이상 한국을 지배할 수 없다. 일본에 대한 투쟁만이 우리를 자유의 생명으로 인도할 마지막이자 유일한 대안이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이 자료는 일제하에서 이미륵을 비롯한 한국의 해외유학생들이 가진 우리 역사 문화에 대한 자부심,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 조국의 독립을 위해 국제적 움직임을 기민하게 포착하여 활동하고자 했던 의지와 노력을 말해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