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rch 30, 1997

韓國 學生運動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韓國學生運動 어제와 오늘 그리고
 
60年代
 
韓國學生運動 뿌리는 멀리 일제하의 3·1운동이나 광주학생운동(光州學生運動)에 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현대사(現代史)에 소위 『Student Power』의 실체(實體)를 부각(浮刻)시킨 것은 60년대의 4·19혁명부터라 할 수 있다.
 
4·19혁명은 아직까지도 현대사적 의의가 정립되지 않은 채 논란이 계속되고 있지만 60년대를 연 학생운동의 시발점(始發點)이었음 에는 이견(異見)이 없다.
 
4·19는 자유당(自由黨) 정권의 부패(腐敗)와 무능(無能)이라는 객관적 조건과 자유당 치하(治下)에서 있었던 56李承晩박사 再出馬요청 궐기대회와 같은 관제궐기대회(管制蹶起大會) 등에 단골로 동원되다시피 하다 57 4월 서울大法大生들의 李康石(대통령 양자) 입학반대 동맹휴교 등 일련의 학내집회로 조금씩 성숙돼간 학생내부의 주관적 역량이 조화를 이룬 결과였다.
물론 봉건잔재청산(封建殘在淸算)과 신식민지반대운동(新植民地反對運動)을 벌여 나가던 제3세계 Group과 냉전논리와 권위주의적(權威主義的) 정치체제청산을 부르짖은 ·· 선진국의 학생운동물결에도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60 2 28일 대구 慶北高학생들의 일요등교거부시위를 시발로 시작된 4·19 3·15부정선거강행과 최루탄에 의한 김주열(金朱烈)군 사망사건으로 불을 당긴 뒤 4·18 高大生시위와 4·19연합시위로 절정을 이루었다.
 
4·19는『반독재민주화투쟁』이라는 이념을 한국학생운동에 제공해주었지만 『운동주체의 조직화』의 부재는 곧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교훈을 남겼다. 5·16군사 구데타에 의해 좌절된 4·19는 그러나 학생운동의『도덕적 건강성(道德的健康性)』이라는 자산(資産)을 남겼다.
 
4·19이후 5·16에 의해 한때 소강상태에 빠진 학생운동은 64 324일부터 6 3일까지의 소위 6·3사태(한일회담반대운동)를 통해『외세민족주의』라는 학생운동의 또 다른 이념을 곧추세웠다.
 
매국적 한일회담에 반발, 73일 동안 전국을 박정희 열기에 빠지게 한 학생운동의 열기는 결국 6 3일의 비상계엄(非常戒嚴) 선포조치(宣布措置)로 학생·시민 등 348명이 구속(拘束)되면서 끝났다.
 
65년 들어 한일협정 비준반대투쟁(批准反對鬪爭)으로 한때 되살아났던 학생운동은 그후 인혁당(人革黨)사건(’64), 베를린사건(’67), 민족주의비교연구회(民族主義比較硏究會)사건(’67), 통일혁명당(統一革命黨)사건(’68) 등 일련의 대형 공안사건의 여파로 한때 주춤했었으나 69년 공화당 정권의 3선 개헌책동움직임에 맞서 개헌저지투쟁을 벌이며 다시 활성화됐다.
 
64년에서 69년 사이의 운동침체기에 농촌과 생산공장현장으로 진출, 민중을 조직하자는 새로운 집단이 생겨났는데 이 Group은 뒤에 80년대의 본격적인 현장진출 Group(소위 위장취업Group)의 제1세대를 이룬다.
 
60년대의 학생운동은 이처럼 4·19로부터 『독재 민주화 투쟁』을, 6·3사태를 통해『외세 자주화 투쟁』이라는 2개의 정신적 지주를 확보, 다음세대에게 이를 넘겨준 셈이다.
 
70年代
 
전태일(全泰壹)의 분신(70 11 13)으로 막은 연 70년대는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이 본격 접목, ·학 연대의 기틀이 다져지는 운동의 질적 도약이 이루어진다.
 
전태일의 분신 닷새 후 서울大商大生2백명이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결부시키기로 하고『근로조건개선』을 요구하며 무기한 단식에 들어간 것을 시작으로 서울지역 각 대학들이 근로조건개선요구시위를 벌였다.
 
이후 학원병영화반대투쟁(교련반대운동)으로 까지 치달았던 학생운동은 72년 유신체제의 등장으로 또 다시 암흑기에 빠졌으며 72년『민청학련(民靑學聯)』사건에 이르기까지 내부조직강화에 몰두하게 된다.
 
그 후 75 5 13일 베트남 적화와 함께 취해진 긴급조치 9호로 인해 사상 유례없는 폭압 통치가 가해지자 5년여 동안 끈질긴 싸움을 벌인다.
 
75 5 11일 서울大農大김상진(金相鎭)군의 할복과 뒤이은『김열사 추모집회(5 22)』는 유신체제와 학생운동의 정면대결 신호탄이었다.
 
이후 79釜馬항쟁과 10·26으로 정권이 몰락하기까지 학생과 정권은 연례행사처럼 맞부딪쳤고 수많은 학생들이 학교에서 쫓겨나고 투옥됐다.
 
이 시기는 학생데모 사실마저 보도가 금지돼 유신데모 사실은 주동학생 구속을 보도한 신문의 1단 기사로나 겨우 시민들이 알 수 있었다. 특히 78 6 26光化門연합시위는 유신기간 중 도심에 까지 진출한 학생들의 연합집회로 효시를 이루었고 이는 釜馬항쟁으로까지 이어졌다.
 
70년대의 학생운동은 거의 예외 없이 주동학생 전원이 구속돼 학교에서 추방됐는데 이는 곧『학생운동명망갱를 양산해 냈고 이들은 80년대 들어 사회 각 분야에 진출, 본격적인 사회운동을 펴나가는 토대가 되었다.
 
비록 10·26이라는 돌발사고로 정권이 내부적으로 붕괴, 완결을 이루지 못하지만 학생운동은 유신투쟁을 통해 국민들에게 학생데모=민주화투쟁이라는 도덕적 정당성을 확립케 해주었다.
 
80年代
 
80년초『서울의 봄』에서부터 출발한 80년대 학생운동은 양적, 질적으로 엄청난 성장을 거듭,『학생운동의 거대한 승리』로 불리는 87년의 민주화대투쟁으로 이어졌고 89 7월에는 임수경(林秀卿)양을 平壤축전에 파견해 온 나라를 충격 속에 몰아넣는 등 가히 혁명적 변화, 발전을 보여왔다.
 
80년대 학생운동의 가장 큰 특징은 60년대나 70년대의 학생운동이 독재권력에 대항하는 낭만적 민주화 운동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것과는 달리, 나름대로의 정칟철학·사회이론으로 무장하고 총체적인 이념을 표방한 본격적 사회변혁운동으로 탈바꿈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런 학생운동의 변모 배경에는 80 5월의 光州민주항쟁이라는 소용돌이가 깔려있다. 光州 부채를 걸머지고 학생운동은 사회과학에의 접근에 용이하고 가장 역동적 집단이란 특징 때문에 선도적인 투쟁을 전개해야 하는 고역을 자임해야만 했다.
 
김근태(金槿泰)씨 부부가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수상기금으로 설립한 민청련(民靑聯; 민주화운동청년연합회) 부설 민족민주운동연구소가 지난 7월 민가협(民家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과 공동으로 펴낸『80년대 민족민주운동 10대 조직사건』은 민노연(民勞聯), 민학련(民學聯) 사건(’81),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85), 민청학련(民靑學聯) 사건(’85), 민추위(民推委) 사건(’85), 勞聯사건(’86), 學聯사건(’86), 반제동맹당사건(’86), 마르크스 레닌주의당 결성기도 사건(’86), 제헌의회그룹사건(’86), 南勞聯사건(’87) 등을 80년대 운동권의 10대 조직사건으로 꼽고 있다. 이들 사건 중 일부는 사건당사자들이 고문에 의해 조직의 실체가 왜곡됐다는 주장을 펴고 있지만, 대부분이 학생운동 또는 그 출신자들이 주도한 굵직한 공안사건들이었다는 점에서 분출하던 80년대 학생운동의 위력을 반증해 준다.
 
10·26이후 12·12를 거쳐 5·17에 이르는 기간동안 학생운동은『안개정국』으로 표현되던 당시의 정세분석과 투쟁방법을 놓고 단계적 투쟁론과 전면적 투쟁론으로 나뉘어 한동안 갈피를 잡지 못한다. 처음에는 단계적투쟁론이 우세했으나 5월로 접어들면서 전면적투쟁론이 일반 학생들의 감정과 맞아떨어지면서 학생들은 가두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서울역회군후 5·17로 비상계엄이 확대되고 光州사태가 터지자 회군파는『패배주의와 투쟁성의 결여로 계속 투쟁해야할 상황에서 후퇴하는 전술적 과오를 범했다』고 자기비판을 하게 되고 학생운동은 일시적 침체기를 맞는다.
 
서슬퍼런 계엄령과 학원사찰을 피해 모든 서클이 비공개 지하화하는 등 낮은 포복을 계속하던 학생운동은 12월 서울大生1천여명이『반파쇼 학우투쟁선언』을 뿌리며 교내시위를 강행함으로써 다시 포문을 연다.
 
이후로는 각대학이 경찰이 학원에 상주하는 열악한 조건에도 불구하고『반파쇼투쟁선언문』을 뿌리며 교내시위를 연쇄적으로 벌이게 된다.
 
이 시기 학생운동은 무림-학림논쟁이 시작돼 야비(야학비판)-전망(학생운동의 전망)논쟁, C(CDR; 시민민주혁명론)-N(NDR; 민족민주혁명론)-P(PDR;민중민주혁명론)등을 거쳐 84년의 깃발(MT)-반기발(MC)논쟁까지 맥이 이어지는 운동노선을 둘러싼 팸플릿(소책자) 논쟁이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무림이 전체운동을 이끌어나갈 주도체인 학생운동의 역량을 파괴할지 모르는 시위를 자제하고 자체역량조직에 주력하자는 입장이었던 반면 학림은『서울의 봄』이 좌절된 것은 전위 조직의 부재때문이라고 보고 전국적 전위조직체를 만들어 간단없는 투쟁에 나서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 시기 학생운동은 지하서클을 통한 이른바『의식화 학습』으로 끊임없이 운동권 학생을 재생산하며 치열한 교내시위를 계속하고 82년 말부터는 대학간 연합가두시위까지 벌이는 등 괄목할만한 양적 성장을 이룩해 84 5공의 유화정책이었던 학원자율화조치를 이끌어 내기에 이른다.
 
학원자율화조치로 총학생회가 부활되고 학생운동의 양적팽창은 절정에 달해 84 11全學聯(전학련; 전국학생총연맹)이 결성되고 85 5월 그 산하옌민중자주화와 민족자주통일을 위한 투쟁위원회』(삼민투)가 설치된다.
 
80년대 상반기 학생운동이념의 종합적인『민족, 민주, 민중』의 三民이념으로 무장한 삼민투소속 서울, 연세, 고려, 서강, 성균관大生73명은 5 23일 서울문화원을 점거, 광주사태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는 농성을 이틀간 벌여 점거농성시대의 문을 열었다.
 
문화원점거농성을 계기로 학생운동은 민주화를 가로막는 외세의 영향문제를 집중 토론한 끝에 86년부터 반제직접투쟁론을 주장하고 NLPDR(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를 내세운『반미 자주화 반파쇼 민주화 투쟁위원회(自民聯)』와 NDR(민족민주혁명)를 내건『반제반파쇼민족민주투쟁위원회(民民鬪)』의 양대세력으로 갈라졌다.
 
富川 성고문사건에 이어 87 1朴鐘哲 고문치사사건이 폭로되자 학생운동은 고난받는 학생운동의 도덕적 정당성을 부각시키며 개헌정국에 뛰어들었다.
 
학생운동은 6 10일『고문살인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에 적극 참여, 26일까지의 6월 항쟁을 사실상 주도해 6·29선언을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전국적연합조직의 필요성에 따라 8 19忠南大에서『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全大協)』를 결성하고 80년대 후반기 운동이념의 총합적인『자주, 민주, 통일』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NL주도의 全大協 지난해 6월과 8월『남북학생회담』과『8·15남북국토순례대행진』을 추진하면서 우리사회를 온통 통일논의의 열기 속으로 몰아 넣었다. 하지만 80년대를 마감하는 올 들어서 全大協 林秀卿양을 平壤 보내 그 어느 때보다 따가운 여론의 화살을 받았고 부산東義大사태와 설인종(薛仁鐘)군 상해치사사건으로 도덕적 정당성에 큰 손상을 입었다.
                                                   
                                                                         1987 3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