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조들의 숨결이 살아 있는 옛 서울의 한복판, 21세기를 걷는 대표적인 한옥마을인 북촌(北村) 트레킹(Trekking)에 나섰다.
서울 도심 한 복판에 과거의 어느 한 지점에서 시간이 정지한 것 같은 동네가 있다. 바로 『북촌』이다. 경복궁(景福宮)과 창덕궁(昌德宮), 종묘(宗廟) 사이에 자리한 북촌은 예로부터 권문세가들의 주거지였던 곳으로 청계천과 종로의 윗동네라는 뜻에서 『북촌(北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졌다고 한다. 축대를 사이에 두고 윗동네에는 한옥마을이 아랫동네에는 현대식 거리가 어우러져 현대와 과거의 정다운 공존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창덕궁(昌德宮) 옆길을 따라서 돌담 너머로 감질나게 보이던 창덕궁의 전경이 언덕길을 오르면서 드디어 한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옛 서울의 한복판을 한걸음씩 내디디며 100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시작이었다.
창덕궁(昌德宮) 돌담길을 따라 다다른 골목 끝에는 각종 전통공방, 궁중음식연구원, 백홍범(白鴻範)가(家) 등 왕실의 일을 돌보며 살아가던 사람들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창덕궁 서쪽 담 막다른 곳에 이르면 옛 빨래터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신선원전(新璿源殿)의 담장과 닿아 있는 이곳은 궁궐에서 나온 물을 이용해 빨래를 했다고 하는 옛날 민가 여인들의 세탁공간이자 놀이공간이었던 장소라 한다. 창덕궁 후원에서 비롯된 물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흐르고 있다.


계동(桂洞)길은 현대사옥에서 시작해 중앙고등학교(中央高等學校)에서 끝을 맺는 소박한 길이다. 이 길에는 슈퍼마켓, 미용실, 목욕탕, 가게, 분식집 등 소규모의 근린상업 시설들이 즐비해 있어 주민들의 정다운 일상을 엿볼 수 있다. 계동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북촌문화센터를 비롯하여 다양한 박물관 표지와 마주하게 된다. 또한 학교근처의 문방구며 튀김집, 요즘 보기 힘든 1960~197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오래된 목욕탕과 이발소, 문방구 등과 마주치게 되는데, 특히 45년 전 간판을 그대로 간직한 채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문화당 서점’이 눈에 띈다. 서점 맞은편으로 오밀조밀하게 각종 공방들이 새로 들어서 있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길이 형성되어 있다.



골목 끝자락에 중앙고등학교(中央高等學校)가 자리 잡고 있는 계동(桂洞)길은 등교할 때나 하교할 때, 작은 길을 메우는 교복 입은 학생들의 풍경이 언제나 풋풋함을 더해준다. 또한, 계동길에는 많은 역사적 장소가 숨어 있는데, 일제 치하 당시 중앙고보(中央高普) 교사로 재직하던 송진우(宋鎭禹), 현상윤(玄相允) 선생 등이 이 학교 숙직실에서 3.1운동을 위한 준비모임을 갖고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고 하며,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이 1918년 9월 월간지 유심을 창간했던 유심사터(惟心社址), 중앙고보(中央高普)의 주인이자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와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를 세우고 3.1운동을 막전막후(幕前幕後)에서 지원한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가 살았던 대저택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김성수 옛집도 이 길에 있다.




구불구불한 길을 돌아 마침내 당도한 정독도서관(正讀圖書館)이 있는 안국동(安國洞) 학교 골목, 감고당(感古堂)길에 다달아서 과거로부터의 시간여행이 끝이 났다. 길게 늘어선 분식점과 문방구 등이 학교 골목길의 분위기를 더해주는 감고당길은 정독도서관에서 덕성여중고(德成女中高)를 거쳐 풍문여고(豊文女高)로 이어져 있으며, 우리나라 근대 역사의 긴장이 넘실대던 곳이기도 하다. 풍문여고에는 안동별궁(安洞別宮)이 있었고, 이웃한 덕성여고에는 안동별궁에 불을 지르고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킨 서광범(徐光範)의 집이 있었으며, 덕성여중은 3.1운동을 모의했던 천도교(天道敎)의 중앙 본부가 자리했던 터이다.


경복궁(景福宮)과 창덕궁(昌德宮), 종묘(宗廟)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전통한옥이 밀집되어 있는 서울의 대표적인 전통 주거지역인 『북촌(北村)』은 많은 사적들과 문화재, 민속자료가 있어 도심 속의 거리 박물관이라 불리어지는 곳이다.
청계천(淸溪川)과 종로(鍾路)의 윗동네라는 의미에서 북촌(北村, North Village)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진 이곳은, 이름도 정겨운 가회동(嘉會洞)과 송현동(松峴洞), 안국동(安國洞) 그리고 삼청동(三淸洞)이 있다. 사간동(司諫洞), 계동(桂洞)과 소격동(昭格洞) 그리고 재동(齋洞)에는 역사의 흔적이 동네이름으로 남아 수백 년을 지켜온 곳이기도 하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사회, 경제상의 이유로 대규모의 토지가 소규모의 택지로 분할되었으며, 지금 볼 수 있는 어깨를 맞댄 한옥은 1930년도를 전후하여 변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한옥형식의 변화는 도심으로 밀려드는 인구들로 인해 고밀도화 되어가는 사회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조선시대로부터 근대까지 이어지는 유적과 문화재들은 북촌의 역사를 이야기 해준다.
북촌(北村)은 한양의 중심부, 경복궁(景福宮)과 창덕궁(昌德宮) 사이에 자리잡고 있고 북악(北岳) 응봉(鷹峰)을 잇는 산줄기의 남쪽 기슭에 위치하여 풍수지리적으로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어 예로부터 권문세가(權門勢家)들의 주거지로 자리매김 해왔다. 실제로 1906년 호적자료에 따르면, 북촌 전체인구 10,241명(1,932호) 중 호주의 신분에 따른 구분에서 양반과 관료가 43.6%를 차지하고 있어 권문세가들의 주거지로 양반들의 주택들과 관료들의 집들이 중심을 이루는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북촌지역의 가장 큰 특성은 지형과 물길이라 할 수 있다. 북촌의 지형은 남쪽이 낮고 북쪽으로 갈수록 경사가 심해지면 네 곳의 골짜기가 형성되어 있다. 물길은 계곡을 따라 흐르며 길들은 물길과 나란히 형성되어 있다. 따라서 길의 형태는 물길을 따라 자연스럽게 남쪽으로 향하고 있으며 1750년 도성도(都城圖), 1892년 수선전도(首善全圖), 1927년 경성시가도(京城市街圖), 그리고 2000년 이후인 현재 지도까지를 살펴보면 삼청동(三淸洞)길, 가회로(嘉會路), 계동(桂洞)길, 원서동길(창덕궁길) 등이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많은 역사유적들과 더불어 매우 중요한 자원으로 평가되고 있다.
조선시대부터 형성되었던 옛길과 물길의 흔적이 남아 있는 북촌지역에는 1900년 이후부터 급속하게 형성된 한옥들이 군락을 이루는 등 많은 자원들이 분포되어 있으며, 이외에도 경복궁(景福宮)과 마주하고 있는 삼청동(三淸洞)길 주변에는 많은 갤러리가 늘어서 있고, 화동(花洞)길과 더불어 각종 먹거리 자원과 특색 있는 카페가 자리잡고 있으며, 원서동(苑西洞)에는 전통 기능의 보유자 및 예술인들이 모여 살고 있다. 최근에는 건축가, 미술가들이 북촌의 역사성 속에 함께 하고자 북촌 내부에 작업실과 사무실 등을 개설하고 있어 북촌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와 내용을 발전시키는 하나의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과거 북촌에는 북쪽의 능선에서 남쪽으로 전개되는 구릉지를 따라 몇 줄기 물길이 흐르고 있었다. 이 남북방향의 물길들은 서울의 주요 젖줄 중의 하나로 잿골, 맹현골, 재생원골, 원골 등과 같은 옛 지명에서 보듯, 각 동네는 물길과 물길 사이의 능선을 경계로 좁고 길게 형성되었다. 경복궁(景福宮) 동쪽 담장을 따라 흐르고 있는 제법 큰 하천인 중학천(中學川)의 좌우로 삼청동(三淸洞), 사간동(司諫洞), 소격동(昭格洞)이 자리하고 있다.
다시 그 동쪽에 작은 두 물길 주변으로 화동(花洞)과 안국동(安國洞), 송현동(松峴洞)이 있으며, 가회동(嘉會洞)에서 운현궁(雲峴宮) 앞으로 흐르는 가회동 물길 역시 제법 수량이 풍부한 하천이었다. 가회동(嘉會洞) 물길과 나란히 계동(桂洞) 물길, 원서동(苑西洞) 물길이 흐르고 있는데, 원서동 신선원전(新璿源殿)에서 시작해서 창덕궁(昌德宮) 담장을 따라 흐르다가 창덕궁 내부를 지나 와룡동(臥龍洞)으로 흘러 들어가는 물길 역시 중요한 하천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이들 북촌의 물길들은 마을의 인구가 늘어나고 도시가 현대적으로 개발됨에 따라 메워져 도로로 바뀌었지만, 물길의 기억은 여전히 마을의 옛 이름으로 남아있다. 북촌은 물길을 따라 이루어진 마을이었다.
과거 북촌에는 북쪽의 능선에서 남쪽으로 전개되는 구릉지를 따라 몇 줄기 물길이 흐르고 있었다. 이 남북방향의 물길들은 서울의 주요 젖줄 중의 하나로 잿골, 맹현골, 재생원골, 원골 등과 같은 옛 지명에서 보듯, 각 동네는 물길과 물길 사이의 능선을 경계로 좁고 길게 형성되었다. 경복궁(景福宮) 동쪽 담장을 따라 흐르고 있는 제법 큰 하천인 중학천(中學川)의 좌우로 삼청동(三淸洞), 사간동(司諫洞), 소격동(昭格洞)이 자리하고 있다.

한옥 사이사이로 실핏줄처럼 얽혀 있는 북촌의 골목길들은 한옥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성(日常性)이 담긴 생활공간이라 할 수 있다. 한옥에서의 생활은 담장의 안쪽에서 뿐만 아니라 담장 밖 골목에서도 여전히 일어난다. 골목은 빨래를 널고, 곡식이나 고추를 말리고, 아이들이 뛰노는 또 하나의 마당인 동시에, 이웃과의 담소가 오가고, 동네 노인들이 어울리는 마을 공유의 공간이라 할 수 있겠다. 한편, 한옥동네를 방문하는 사람에게는 서울 시민이 함께 공유할 도시경관이 된다.
작은 한옥들이 군집하여 만들어 내는 북촌 골목길의 풍경이 가지는 아름다움은 서울의 대표적인 역사경관으로서 가치를 가지며 골목길 곳곳마다 옛 기억과 마주치게 된다.

조선시대 화기도감터(火器都監址)와 성삼문선생(成三門先生) 살던 곳이란 대리석 비문(碑文) 두개를 확인하고 골목으로 들어서면 화동(花洞) 골목길이 시작된다. 물이 흐르듯 가지에 가지를 친 미로와 같은 골목길, 마주 오는 두 사람의 어깨가 닿을 듯, 좁아지는가 하면 어느새 우마가 지나다닐 만큼 넓어진다. 차가 들어올 수 없어 온전히 사람이 주인인 이 골목길은 이제 흔치 않은 풍경에 대한 기대로 남아있다. 골목길, 경사진 계단 가에 내놓은 소박한 화분 두엇에 북촌 골목길의 정감이 느껴진다.
서울시가 한옥마을 주거지인 북촌을 서울의 대표적 문화관광지로 만들어 나가기 위해 북촌을 가장 잘 감상할 수 있는 장소 8곳을 지정하여 『북촌8경(北村八景)』이라 칭하였다. 한옥의 아름다움과 북촌 골목길을 구석구석 즐길 수 있는 풍경이 주로 선정되었다.
서울시가 한옥마을 주거지인 북촌을 서울의 대표적 문화관광지로 만들어 나가기 위해 북촌을 가장 잘 감상할 수 있는 장소 8곳을 지정하여 『북촌8경(北村八景)』이라 칭하였다. 한옥의 아름다움과 북촌 골목길을 구석구석 즐길 수 있는 풍경이 주로 선정되었다.
선조들의 숨결과 비밀을 간직한 듯 미로처럼 얽혀있는 북촌 골목길은 우리가 살아온 삶의 흔적이자, 문화이자, 보물이다. 북촌 8경을 따라 걸으면서 마주하게 되는 골목길 풍경 속에서 깊은 역사와 굴곡진 세월의 한 켠에서 묵묵하게 살아남은 북촌을 만나보자.



600년 선조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북촌(北村)』은 걷는 곳이다. 서울 도심 속 한옥마을 주거지인 북촌은 조선시대부터 형성되어온 유서 깊은 다수의 문화유산과 도시한옥, 박물관, 공방들이 발길 닿는 곳곳에 자리하고 있어 한국 고유의 다양한 문화를 체험하고 알릴 수 있는 트레킹(Trekking) 코스라 할 수 있다.



1. 서울특별시 북촌한옥마을 홈페이지(http://bukchon.seoul.go.kr)
2. 종로구청 역사문화관광 홈페이지(http://tour.jongno.go.kr)
3. 종로구청 e-관광안내소
(http://tour.jongno.go.kr/tour/bbs/BBSMSTR_000000010002/list.do?menuNo=2330)
※ Note:
1. 북촌8경(北村八景)
☞ 북촌1경 … 담 너머 보이는 창덕궁(昌德宮) 전경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했던 창덕궁(昌德宮)의 전경이 돌담 너머로 가장 잘 보이는 장소이다. 북촌문화센터에서 나와 북촌 길 언덕을 오르면 첫 번째 포토 스팟(Photo Spot)이 등장한다. 여기서 바라다보는 창덕궁은 북촌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경관으로 궁궐 담벽 너머로 새로이 복원된 규장각(奎章閣) 권역 및 구선원전(舊璿源殿)이 먼저 보이고 그 뒤로 인정전(仁政殿)의 측면이 보인다.
☞ 북촌 2경 … 원서동(苑西洞) 공방(工房)길
고즈넉한 향기가 묻어있는 원서동 창덕궁(昌德宮) 돌담길을 따라 걷노라면 불교미술관과 연공방을 지나 골목 끝 즈음 궁중음식원의 정갈한 마당과 기와문양의 담이 보이는 그 자리에 북촌의 두 번째 포토 스팟(Photo Spot)이 보인다. 왕실의 일을 돌보며 살아가던 사람들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재미를 더해주는 길이다.
☞ 북촌3경 … 가회동(嘉會洞) 11번지 박물관 골목
한옥 내부를 감상할 수 있는 가회동(嘉會洞) 11번지 일대로 전통문화를 소재로 한 자수박물관을 지나 가회박물관, 매듭공방으로 내려가는 길에 북촌의 세 번째 포토 스팟(Photo Spot)이 보인다. 가회동 11번지는 한옥과 함께 소박함과 전통이 살아 숨쉬는 있는 그대로의 북촌 문화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 북촌4경 … 기와지붕 넘실대는 가회동(嘉會洞) 31번지 언덕의 풍경
가회로(嘉會路)를 건너 돈미약국 옆 골목으로 들어가면 본격적으로 한옥밀집지역인 가회동(嘉會洞) 31번지가 펼쳐진다. 좌측 축대 위로 올라가서 바라보는 전경은 가회동 31번지 일대를 한 눈에 조망해 볼 수 있는 지점으로 북촌을 대표하는 경관임에 부족함이 없다. 넘실거리는 기와지붕 사이로 북촌 꼭대기에 위치한 초록색 박공(牔栱)지붕(Gable roof)의 이준구 가옥(李俊九 家屋)이 북촌의 풍경에 독특한 인상을 더해준다.
☞ 북촌5경 … 아래에서 올려다 본 가회동(嘉會洞) 31번지 골목
북촌에서 특히 뛰어난 한옥들이 잘 보존된 가회동(嘉會洞) 31번지 골목길에 다섯 번째 포토 스팟이 있다. 키 큰 회나무 집을 돌아 올라가면 처마를 서로 맞대고 빼곡하게 늘어선 옛스러운 한옥들이 반갑게 맞이해주는 곳으로 서울시 북촌한옥보존 사업 초기부터 적극적인 골목보호 정책으로 밀집 한옥의 경관과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 북촌6경 … 가회동(嘉會洞) 31번지 골목에서 내려다 본 서울
북악(北岳)을 닮은 기와지붕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가회동(嘉會洞) 31번지 한옥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면 언덕길 막바지에 여섯 번째 포토 스팟이 있다. 이곳에서 한옥 지붕 사이로 펼쳐지는 서울 시내의 풍경은 단연 북촌의 백미라 할 수 있다.
☞ 북촌7경 … 가회동(嘉會洞) 31번지 옆 골목의 소박한 풍경
북촌 5경과 6경이 많은 방문객들에게 사랑받는 골목길이라면 북촌의 일곱 번째 장소는 한옥이 주는 고즈넉함과 작은 여유로움을 만날 수 있는 소박한 골목 전경이다. 담을 맞대고 이웃한 집 계단 위에 놓여 있는 아기자기한 꽃 화분 속에서 주민들의 일상이 친근하게 느껴진다.
☞ 북촌8경 … 삼청동(三淸洞) 돌층계길
빼곡한 한옥들의 지붕과 경복궁(景福宮), 인왕산(仁王山), 청와대(靑瓦臺)의 조망이 좌측으로 복정길을 따라 오르다보면 삼청동길로 내려가는 돌층계길이 흥미롭다. 삐뚤 빼뚤, 넓어졌다 좁아지는 돌층계길을 끝까지 내려가면 북촌의 마지막 여덟 번째 포토 스팟이 있다. 여기서 바라보는 돌층계길은 아무렇게나 생긴 듯 볼품없어 보이지만 커다란 하나의 암반을 통째로 조각해서 만든 계단이라는 점에서 독특한 골목길 경관을 조성한다.
2. 신선원전(新璿源殿)
신선원전은 조선시대에 역대 국왕의 어진(초상화)을 모셔 둔 궁전이다. 어진은 6.25 전쟁 때, 부산으로 옮겨졌었으나 화재로 인해 불타버려 지금은 볼 수 없게 되었다.
3. 빨래터(신선원전 담 아래)
창덕궁(昌德宮)의 서쪽 담을 따라 걷다가 막다른 곳에 다다르면, 창덕궁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를 볼 수 있다. 궁궐에서 여인이 세수를 하거나 빨래를 할 때, 쌀겨나 조두 등을 사용해서 물이 뿌연 색을 띠었는데, 이런 물에서 빨래를 하면 때가 잘 진다고 해서 이곳이 빨래터가 되었다고 한다.
4. 원서동 백홍범 가옥(苑西洞 白鴻範 家屋, 서울시 민속자료 제 13호 , 원서동 9-5)
원서동 언덕 막바지, 비원 담 밖에 있는 이 집은 흔히 ‘장희빈 집터’라고 불리던 곳으로서, 상궁이던 여성이 대궐을 나왔을 때, 기거하던 집이었다.
5. 원서동 고희동 가옥(苑西洞 高羲東 家屋, 등록문화재 84호, 원서동 9)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의 집으로, 그가 죽기 전 6년을 제외하고 41년간 기거한 곳이다. 이 집의 외부는 한옥의 모양이지만, 내부는 양식과 일본식이 적당히 섞여 있는데, 고희동이 직접 한옥의 밑그림을 그려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6. 창덕궁(昌德宮)
태종5년, 정궁인 경복궁(景福宮)의 이궁(離宮)으로 지은 궁궐이다.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이웃한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東闕)이라 불렀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불에 타자 광해군 때에 다시 짓고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정궁 역할을 했다.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했던 궁궐이다.
7. 중앙고등학교(中央高等學校, 본관-사적 제281호, 서관-사적 제282호, 동관-사적 제283호, 계동 1번지)
3.1운동의 거사 준비는 1919년 1월, 동경 유학생 송계백이 중앙고보(中央高普; 현재의 중앙고등학교) 숙직실로 교사 현상윤을 방문해, 교장 송진우와 함께 한 자리에서 동경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알리고 ‘2.8독립선언서’ 초안을 전달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학교의 앞마당에는 당시 모습대로 복원된 숙직실이 3.1운동이 배태(胚胎)된 장소로서 기념되고 있다.
8. 석정(石井)보름우물터(계동 55번지 앞)
우물이 돌로 쌓여져 동네이름이 석정(石井)골이라 불리웠다고 하며, 이 우물의 이름이 보름우물인 연유는 15일 동안은 맑고 15일 동안은 흐려지곤 해서 보름우물이라고 불려졌다. 외국인 최초의 선교사였던 주문모 신부는 계동에 숨어 살면서 선교를 할 당시 이 우물에서 길어낸 물로 영세를 주었다고 한다.
이곳은 궁에서도 물을 길러 올 정도로 물맛이 좋았다고 한다. 당시 국내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중국의 주문모 신부가 최안길의 집에서 머물며 이 우물에서 길어낸 물로 영세를 주었다고 하며, 이후 천주교 박해로 순교자가 발생하자 물맛이 변해 한동안 발길이 끊겼다고 전해진다.
9. 김성수(金性洙) 옛집(계동 128-3)
인촌(仁村) 김성수는 중앙고보(中央高普)의 주인이자, 경성방직, 동아일보와 고려대학을 세운 민족 지도자였다. 김성수의 거처는 3.1운동을 위해 기독교, 천도교계, 불교계가 규합을 합의했던 역사적인 장소였다. 김성수 옛집에는 김성수 부자가 살았던 대저택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10. 북촌문화센터(계동 105번지)
서울시에서 운영하고 있는 북촌문화센터는 한옥의 멋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국악, 다례, 천연염색, 매듭공예 등 전통문화 강좌를 운영하고 있으며, 북촌 도보 관광지도 및 전통문화체험 등의 북촌관련 자료를 제공받을 수 있다.
11. 가회동 이준구 가옥(嘉會洞 李俊九 家屋, 서울시 문화재 자료 2호, 가회동 31-1)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개화기 상류계층의 양옥으로 북촌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다. 개성 송악의 신돌인 화강암과 프랑스 기와를 사용한 건물로, 초록색의 박공(牔栱)지붕(Gable roof)지붕이 북촌의 풍경에 독특한 인상을 더한다.
12. 가회동 김형태 가옥(嘉會洞 金炯泰 家屋, 민속자료 제30호, 가회동 16-8)
김형태 가옥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세워진 건물로 추정된다. 안채, 사랑채, 문간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중 사랑채는 명성황후와 관련된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13. 가회동 백인제 가옥(嘉會洞 白麟濟 家屋, 민속자료 제22호, 가회동 93-1)
고종 11년, 한상룡(韓相龍)이 세운 집으로 압록강 흑송(黑松)을 가져다 지었다고 전한다. 크게 행랑채, 안채,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랑채와 안채는 일반적인 서울지방 상류주택들과 달리 한 동으로 이어져 있다. 조선 후기 주택으로 보존상태가 좋고 사랑마당으로 들어서는 대문과 안마당쪽 담의 꾸밈이 눈길을 끈다.
14. 가회동 한씨가옥(嘉會洞 韓氏 家屋, 민속자료 제14호, 가회동 178)
조선 후기에서 일제시대 초기 사이에 지은 한옥으로, 행랑대문채와 본채로 구성되어 있다. 본채는 사랑채 부분과 건넌방 부분이 복도를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 부분은 왼쪽에 현관과 홀을 내었고 서남쪽에 대청을 두어 정원을 내다볼 수 있게 하였다. 대청 왼쪽에는 온돌방을, 그 앞쪽에는 주인실을 배치하고 툇마루를 돌렸다. 서양과 일본풍의 현대식 생활기능을 도입하여 지은 건축물로 개화기 이후 문화주택의 초기 양식에 속한다.
15. 안국동 윤보선가(安國洞 尹潽善家, 사적 제 438호, 안국동 8-1)
윤보선(尹潽善) 전 대통령이 거주한 집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정당인 한국민주당의 산실일 뿐만 아니라, 대통령으로 재직할 당시의 집무실로서, 근대 정치의 중심지였다. 한옥의 양식과 생활의 편리함을 위한 서양식 생활가구와 세부장식이 절충되어 있어 근대 주택의 변천을 엿볼 수 있다.
16. 삼청공원(三淸公園)
북악산(北岳山)과 이어지는 산속의 공원으로, 수백년 된 소나무의 울창한 숲,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과 약수터가 싱그럽다. 공원 안에는 서울의 옛 성곽과 성곽의 북문이었던 숙정문(肅靖門), 고려의 충신 정몽주와 그 어머니의 시조비 등이 남아 있어서, 자연과 더불어 역사의 정취를 함께 느낄 수 있다.
17. 기기국 번사창(機器局 飜沙廠, 시도 유형문화재 제51호, 삼청동 28-1 금융연수원 안)
조선시대 말 근대식 무기를 제조하기 위해 설치한 건물이다. 벽돌조의 건물로 중국과 서양의 건축양식이 절충되어 있다. 번사(飜莎)란 폭발시킬 때, 천하가 진동하는 소리가 나고 대낮처럼 밝은 빛이 난다는 뜻이다.
18. 정독도서관(正讀圖書館, 화동 1)
이 곳은 사육신의 대표격인 성삼문(成三問)과 조선말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金玉均)이 살았던 곳이다. 약 400년의 시차를 두고 조선정치사의 두 거목이 같은 장소에서 정치적인 포부를 키웠다. 그 후 이 자리에 경기중고교가 설립되었는데, 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지금의 정독도서관이 되었다.
19. 경복궁(景福宮)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창건한 경복궁은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法宮)이다. 북으로 북악산을 기대어 자리 잡았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는 넓은 육조(六曺)거리(지금의 세종로)가 펼쳐져 있어, 왕도인 한양 도시계획의 중심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