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May 03, 2013

국보 1호와 보물 1호......국보 1호는 숭례문, 보물 1호는 흥인지문

국보 1호와 보물 1......국보 1호는 숭례문, 즉 남대문이고, 보물 1호는 흥인지문, 즉 동대문이다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4 29번지에 소재한 숭례문(崇禮門)은 조선시대 서울 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불렀다. 태조 4(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1398)에 완성되어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숭례문(남대문)은 세종 29(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수리 때 성종 10(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 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인 숭례문의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붕을 우진각 지붕이라 한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곡이 심하지 않고 짜임도 건실해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양녕대군이숭례문이라고 현판을 썼다고 『지봉유설』의 기록되어 있어서 서울 성곽 중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라 확인되고 있으며, 1962 12 20일 국보 1호로 지정되었다.

2008 2 10일 방화로 소실되었던 숭례문(남대문)은 무려 5 3개월의 복구 공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되돌아 왔다. 2013 5 4일 복구기념식에서 현판이 걸리고 나면, 5 5일부터 일반인들에게 공개가 된다고 한다.
구한말의 숭례문(남대문)의 모습
 
일제강점기의 숭례문(남대문) 모습
 
해방직후의 숭례문(남대문)의 모습
 
6.25동란 당시의 숭례문(남대문)의 모습
 
현대 숭례문(남대문)의 모습
 
숭례문(남대문) 화재 모습
 
복구된 숭례문(남대문)의 모습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6 69번지에 소재한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서울 도성에 딸린 8개의 문 중의 하나로서 정동(正東)에 있다고 하여 동대문(東大門)이라 불리운다. 1396(태조 5)에 건립되고 1453(단종 1)에 중수되었으며, 1869(고종 6)에 이르러 이를 전적으로 개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화강암의 무사석(武砂石)으로 홍예문(虹門)을 축조하고 그 위에 중층의 문루를 세웠으며 문 밖으로는 반달 모양의 옹성(壅城)을 둘리고 있다. 문루의 아래층은 주위 4면을 모두 개방하였으나 위층은 기둥 사이를 모두 창문과 같이 네모나게 구획하여 각각 한 짝 열개의 판문(板門)을 달았다.
흥인지문(동대문)은 성문이라는 특수한 건물이기 때문에 위층 천장은 다포집 계통에 속하는 건축이면서도 지붕 가구재(架構材)를 전부 노출한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공포()는 아래층이 내삼출목(內三出目) 외이출목(外二出目)이고 위층은 내외삼출목(內外三出目)인데 쇠서(牛舌)의 형태는 매우 섬약하고 번잡하게 장식화된 부분이 많으며 조선 후기의 쇠퇴된 수법이 곳곳에 엿보인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1963 1 21일 보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흥인지문(동대문) 2008 2 10일 숭례문(남대문)이 방화로 소실된 후부터 다시 복원될 때까지 국보 1호를 대신하여 우리 민족과 전세계의 이목을 받으며, 국보와 보물의 역할을 다했다. 숭례문(남대문)이 복원되기까지 숭례문(남대문)이 그리운 이는 흥인지문(동대문)을 대신 보면서 추억을 하였다. 흥인지문(동대문)은 보물 1호이지만 우리의 마음 속에 국보 1호의 모습과 가치도 함께 선사해 주었던 것이다.
현대의 흥인지문(동대문)의 모습
 
해방 당시의 흥인지문(동대문)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