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June 19, 2014

우리나라 근대화 과정에 형성된 중국풍의 거리를 걷다 … 인천 차이나타운(Chinatown) 트레킹(Trekking)

인천역에서 자유공원 쪽을 올려다 보면, 누구라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중국풍의 거리가 시야에 들어온다. 우뚝 솟은 페루를 지나 계속 경사진 길을 300m 정도 걷다 보면 T자형으로 길이 나뉘어지고 주변 상가는 온통 중국의 거리에 온 듯한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차이나타운(Chinatown) 트레킹(Trekking)을 마치고 난 후엔, 전통 중국요리의 맛을 3대째 이어가고 있는 100년 전통의 맛집 연경(燕京)’에서 특유의 하얀짜장면을 맛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연경이란 중국 베이징(北京; 북경)의 옛 이름으로 과거 연(()나라의 도읍이었다 하여 그렇게 부려지기도 했다.
인천시 중구 선린동과 북성동 일대에 위치한 차이나타운(Chinatown) 거리에는 붉은 색 간판과 홍등이 내걸리고, 음식점이나 진열된 상품들도 거의가 중국 일색이다. 이렇게 화려하게 단장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볼거리와 먹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는 차이나타운의 역사를 뒤집어 보면 누구보다도 눈물겨운 세월을 보내면서 화교 사회의 명맥을 이어 온 화교들의 삶이 있다.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된 이후 중국인들이 모여 살면서 중국의 독특한 문화가 형성된 인천 차이나타운(Chinatown)은 개항기의 이국적인 문화도 접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인천의 차이나타운은 다른 나라에 있는 차이나타운과는 근본적으로 형성 구조가 다르다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최초 노동자부터 근대 중국의 불안한 정국을 피해 이주한 중산층까지 다양한 계층이 포함되어 중국인 거리가 형성된 다른 나라의 경우에 비하여, 우리나라의 경우는 짧은 기간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는 근대화 과정에서 가까운 거리의 이점을 살려 주로 상업을 위해 이곳에 안주를 한 중국인들의 터전이었다는데 차이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인천의 차이나타운에 거주하게 된 화교는 약 130년 전인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의 군인과 함께 온 40여명의 군역상인들이 이 땅에 정착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주로 푸젠성, 저장성 등 남방인들로 청나라 군대에 물자를 공급하면서 조선 상인들과의 무역도 하였으며, 그 후 1884 4 "인천화상조계장정(仁川華商租界章程)"이 체결되면서 지금의 인천시 선린동 일대의 5,000평 토지에 중국 조계지(租界地)가 세워졌고, 그 해 10월 청국 영사관도 이곳에 세워졌다고 한다. 중국의 조계지가 생긴 후 중국의 건축 방식을 본뜬 건물이 많이 세워졌기에 이곳을 바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차이나타운(Chinatown)』의 최초 형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 원세개(袁世凱; 위안스카이)가 조선 통상 사무를 맡아 1887년에는 부산, 1889년에는 원산에 조계지역에 대한 담판을 성공시켜 중국 조계지역은 계속해서 확장되었다. 인천에 조계 지역이 설립되면서 화교의 수는 급증하여 1883 48명이던 화교의 수는 1년 후에는 5배에 가까운 235명으로 늘어났고 1890년에는 약 1,000여명에 이르렀다. 당시 화교의 대부분은 인천을 상업 활동의 중심으로 삼고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중국에서 수입한 식료 잡화를 팔고 다시 조선의 사금 등을 중국에 보내어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장의 전반적인 상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특히 인천 조계지 내의 화상들은 한국 전역에 퍼져 있는 화상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사업은 날로 흥성하게 만들었다. 자료에 의하면 1884 35척의 청조 선박이 인천과 마포항을 왕래하였으며 13,000톤의 화물을 운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당시 청나라 사람들은 청나라 정부의 후원을 받으며 조선에서는 귀한 물품인 비단, 광목, 농수산품 및 경공업품을 수입하여 엄청난 이익을 획득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장기 거주를 목적으로 인천에 상가 건물이나 주거할 집을 지을 필요성이 생겨 중국식 건축에 필요한 목수, 기와공, 미장공들도 한국으로 들어 오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특히, 인천과 뱃길이 트인 산동성에서는 조선의 인천은 돈벌이가 잘되는 곳으로 소문이 번져 많은 산동인들이 서해를 건너 왔다고 전해진다.
 
1887년에는 산동 연태지방(煙臺, 옌타이; Yantai)에 살던 왕씨와 강씨가 채소 종자를 들여와 채소 농사를 시작하니 당시 조선에서는 볼 수 없던 양파, 당근, 토마토 등이 전파되었다고 한다. 특히 중국의 상해, 청도, 연태, 석도 등에서 왕래하는 화물선이 기항하는 인천은 일본인 및 외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다 보니 다른 지역에 비해 화교의 숫자도 많아 지금의 차이나타운이 좁아 경동, 신포동 일대, 용현동, 주안, 부평지역에 나뉘어 살게 되었으며, 상업 활동 외에 채소 시장까지도 그들에 의해 성업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대국인 행세하며 한국인에게 거들먹거리던 세월은 한국 전쟁과 인천상륙작전으로 거의 파괴되고 만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영흥도 앞바다에 정박하여 인천을 향한 함포의 사격을 정면으로 받은 곳이 바로 지금의 차이나타운이었던 것이다. 당시 사진을 보면, 청관 거리는 2층으로 된 중국식 건물들이 즐비했지만 지금 남아있는 곳은 극히 드물다.
 
전쟁이 끝난 후, 화폐개혁으로 장롱 속 돈을 모두 신고해야 했으며, 외국인의 부동산 소유제한으로 인하여 화교는 한국 사회에서 외면 당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들은 반세기 이상 가꾸어 온 주안, 용현동, 부평 일대의 황금 농장을 헐값에 판매하거나 남의 손으로 넘기게 되었으며, 이 시기에 거의 반수 이상의 화교들이 한국을 떠났다. 더군다나 화교들만이 경영하던 중국 음식업계에 한국인들에게도 영업허가를 내줌으로써 화교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중국의 급부상과 하나의 지구촌 시대를 맞이하여 오늘날처럼 인천의 차이나타운의 역사성과 문화성이 재조명되어 문화와 관광의 명소로 부상하기 전까지 한국전쟁 이후 급속도로 위축되었던 화교 사회(차이나타운)는 실로 적지 않은 고난을 겪어 냈던 것이 사실이다.
 
최근 인천시와 중구청은 정부의 지역특화발전특구정책에 따라 차이나타운을 관광특구로 지정하고 정부 예산과 지자체 예산을 집중 투자하여 본격적인 개발을 실시하고 있으며, 관광시설 확충, 상권 활성화를 위한 규제 완화, 중국 상가 조성, 자장면 박물관 조성, 야외문화공간 조성, 테마거리 조성(중국풍 조형물 설치 등), 차이나타운 내 주요 거리 통행 제한, 거리 예술제 실시와 중국어 마을 조성, 기반시설 공사 등 끊임없는 유·무형의 관광 인프라 개발과 투자를 통하여 과거의 화려했던 차이나타운의 영광을 점차 찾아가고 있다고 한다.
 
차이나타운 트레킹 A 코스 (차이나타운 일주코스)
인천역 → 제1페루 → 공영주차장 입구 → 북성동 자치센타앞 → 연경 → 스카이힐 → 제3페루→ 의선당 → 차이나타운1길 → 차이나타운3길 → 제2페루 → 청·일조계지 경계 계단 → 차이나타운2길 → 화교 중산학교 → 삼국지 벽화 거리
( 60분 소요. 이곳에서 인천역으로 되돌아가서 월미도로 가거나 혹은 계속해서 자유공원 쪽으로 관광 가능)
 
차이나타운 트레킹 B 코스 (차이나타운 일주+자유공원 탐방코스)
삼국지 벽화 거리(A코스 끝) → 팔각정 → 한미 수교 100주년 기념탑 → 자유공원 광장 → 맥아더장군 동상 → 인주미술관 → 홍예문 → 대한성공회 인천 내동교회
( 30분 소요, A+B 코스 전체 약 90분 소요)
 
차이나타운 트레킹 C 코스 (차이나타운 일주+근대건축물 탐방코스)
삼국지 벽화 거리(A코스 끝) → 청·일조계지 경계 계단 입구 → ()일본 제1은행 → 중구청 → ()일본 18은행 → ()일본 58은행 → 신포 공영주차장 → ()인천 우체국 → 답동 4거리 → 답동성당
( 30분 소요, A+C 코스 전체 약 90분 소요)
 
차이나타운 트레킹 D 코스 (역사문화의 거리 탐방코스)
한중문화관 → 아트 플랫폼→ 일본 은행 거리 → 일본 영사관(현 중구청)→ 신포동상점가 → 성공회 → 내리 교회 → 답동성당
( 120분 소요)
 
차이나타운 먹거리 지도
 
차이나타운 볼거리 지도
 
차이나타운 살거리 지도
 
자료원:
1. 인천 차이나타운(Chinatown) 홈페이지(http://www.ichinatown.or.kr)
2. 전통 중화요리 연경 홈페이지(http://www.ygchi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