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May 15, 2014

차령산맥 끝자락에 놓여있는 충남 보령의 성주산 트레킹(Trekking) ... 울창한 산림과 기암괴석, 맑은 계곡이 절경을 이루고 있는 초여름의 성주산 자락을 찾다

보령시내로 들어서면 병풍처럼 동남방으로 길게 뻗어 내린 커다란 산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 산줄기는 차령산맥(車嶺山脈)의 끝 부분으로 성태산(星台山, 631m), 문봉산(文奉山, 633m), 성주산(聖住山, 680m), 옥마산(玉馬山, 601m), 잔미산(殘尾山, 417m)으로 연결되어 보령시 웅천읍 대천리까지 이어지다가 화락산(花落山, 207m)을 한 점으로 남기고 서해바다로 사라진다.

오늘은 서해안이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며, 100여년 된 소나무를 비롯하여 40~50년생의 편백나무 그리고 느티나무, 굴참나무, 졸참나무, 밤나무, 때죽나무, 고로쇠나무 등의 천연활엽수로 울창한 숲을 이루고 더불어 기암괴석과 맑은 계곡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성주산(聖住山) 트레킹』을 계획했다.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과 성주면에 겹쳐 있는 해발 680m성주산(聖住山)은 오서산(烏棲山, 해발 791m)과 함께 보령을 상징하는 명산으로 예로부터 무염국사(無染國師)와 최치원(崔致遠) 같은 성인·선인들이 많이 살았다 해서 성주산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문헌에 의하면 신라 태종무열왕의 8세손인 무염(無染)이 당나라로 가서 30년 동안 수행한 뒤 귀국하여 이 산에 있는 오합사(烏合寺)에서 입적하였고 그 뒤 사람들이 성승(聖僧)이 살았던 절이라 하여 성주사(聖住寺)라 부르게 되었고 성주사가 있다하여 산 이름이 성주산으로 불려 지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성문(聖門)이 곳곳에 서서 선()과 선()의 규모를 이루며, 기암으로 이루어진 남쪽의 산세에서는 조선 말기 독립투사를 많이 배출하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서해안이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는 성주산의 수목은 대부분이 천연 활엽수이고 질이 좋은 느티나무, 굴참나무, 졸참나무, 밤나무, 때죽나무, 고로쇠나무 등이 자생하고 있어서 한낮에도 하늘이 보이지 않아 캄캄할 정도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울창한 살림과 더불어 기암괴석, 맑은 계곡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성주산은 봄·여름의 풍경도 좋지만 가을철 단풍과 겨울의 설경이 장관인 산으로도 알려져 있다.

성주산의 남쪽 기슭에는 국보와 보물, 사적 등을 보유한 성주사지(聖住寺址)가 있으며, 차령산맥의 한 지맥인 만수산(萬壽山, 해발 575m)과 성주산 기슭의 화장(花藏) 계곡에는 성주산자연휴양림이 조성되어 있다. 현재 성주산에는 성주사지(聖住寺址) 외에도 백운사(白雲寺) 등의 사찰이 있다. 성주산자연휴양림은 산막, 야영장, 잔디광장, 오토캠프장을 비롯하여 어린이놀이터, 체력단련장, 물놀이터, 삼림욕장, 산책로, 등산로, 만수산 북봉 전망대 등의 시설이 갖춰져 있는 곳이며 성주산과 만수산 산허리로 나 있는 임도를 따라 산악자전거를 즐길 수도 있다. 성주산자연휴양림이 위치한 계곡이 화장(花藏)골이라 불리어지는 데는, 성주산 일대에 모란꽃 모형의 명당이 8개 있는데 그 중의 한 곳이 이 계곡에 감춰져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성주산은 질 높은 무연탄이 많이 매장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실제로 대보탄광, 성주탄광, 풍원탄광, 동보광산, 대풍광산 등 크고 작은 탄광이 몰려 있었으며 현재는 국내 최초로 건립된 보령석탄박물관(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개화리 114-4)에서 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대동지지』에서는 "성주산의 서쪽에서 벼룻돌(硯石)이 나는데, 검정색으로 품질이 좋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화장(花藏)골 맑은 계곡을 따라 성주산으로 오르는 숲길에는 100여년 된 소나무 비롯해서 느티나무, 굴참나무, 졸참나무, 밤나무, 때죽나무, 고로쇠나무 등이 자생하고 있다. 특히 중부지방에서는 드물게 수령 40~50년 된 수천그루의 편백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다. 편백나무는 피톤치드(Phytoncide)를 다량 배출하는데, 피톤치드는 나무와 식물이 해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발산하는 물질로 혈압과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를 낮춰 주며, 몸의 긴장을 완화시켜 주고 불면증과 두통을 없애주며, 식욕을 증진시키며, 집중력을 강화하는 효과가 있다.
 
성주산자연휴양림에는 이런 피톤치드를 다량 배출하는 편백나무들이 장관을 연출하고 있어서 트레커(Trekker)들에게 쾌적한 환경의 치유의 쉼터를 제공하고 있다. 녹음이 짙은 매년 이맘때의 성주산 트레킹은 피톤치드로 샤워하는 환상적인 느낌을 경험할 수 있다. 봄을 지나 기온이 오르고 녹음이 짙어지면서 긴장과 스트레스를 완화하고 심신을 안정시키는 피톤치드가 다량 배출되는 성주산자연휴양림의 울창한 숲 한 가운데 한번쯤은 서봄직도 좋을 듯하다. 

자료원:
1. 보령시청 문화관광안내(http://www.brcn.go.kr/tour.do)
2. 성주산자연휴양림(http://www.brcn.go.kr/forest.do)


에필로그(Epilogue)
신라 55 경애왕(景哀王, 박위응) 후백제 견훤(甄萱) 쳐들어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고려의 왕건(王建)에게 구원을 청한다. 하지만 왕건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경주 계림 포석정에서 연회를 즐기다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고 사로잡혀 자살을 강요받아 자살하게 된다. 이때가 927년인데, 천년을 이어온 신라 왕조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경애왕을 자살시킨 견훤은 경순왕(敬順王, 김부) 허수아비 신라왕으로 세우고 변절하면 용서치 않겠다는 협박을 물러갔다. 포악스러운 후백제 견훤의 침공과 약탈로 왕조의 기능은 마비되었고, 영토는 날로 줄어들었으며, 견디다 못한 신라의 백성들의 민심은 무능한 신라왕실 대신 신라에게 친화적인 고려의 왕건에게로 기울어져 갔다.

이에 경순왕은 군신회의를 소집하여 고려에 항복하기로 결정하였고, 마침내 935 고려 태조 왕건에게 천년사직을 들어 바치며 항복하였으며, 경순왕은 왕건의 낙랑공주를 아내로 맞고 왕에서 정승공으로 하향 봉해지는 신세가 되었다. 후백제의 견훤도 신라의 항복 1 뒤인 936 고려의 왕건(王建)에게 항복하였으며, 이로써 고려 왕건은 통일을 이루게 것이었다.

경순왕(敬順王) 살고 있던 동해의 해변가 경상북도의 경주에서 성주산이 있는 서해의 끝자락인 충청남도 보령지방(대천)까지는 200킬로미터( 209km) 넘게 떨어져 있고 자동차로 쉬지 않고 달려도 4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인데도 희한하게 경순왕의 유적이 성주산 주변에 많이 있다.

성주산은 울창한 숲과 맑은 계곡물이 흐르는 곳으로 옛날 신라의 경순왕이 자주 찾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성주산의 남쪽 기슭에는 국보와 보물, 사적 등을 보유한 성주사지(聖住寺址,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2번지, 사적 307)에도 경순왕이 수시로 찾아 갔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성주사는 당시 신라의 왕과 일행들만이 출입을 있었던 절로서 최치원이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 국보 8) 1개의 보물 5층석탑(성주사지 오층석탑, 보물 19) 2개의 보물 3 석탑(성주사지 중앙 삼층석탑, 성주사지 삼층석탑) 1개의 유형문화재 3 석탑(성주사지 삼층석탑) 등이 있다.

신라 비운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후백제와 후고구려가 일어나 정국이 어지러운 시기에 나라의 국운을 알기 위해서 성주사로 향하고 있었는데 경거망동한 옥마(玉馬) 나타나 앞길을 가로막고 방해를 해서 보다 못한 왕을 호위하던 장군이 화살을 쏘아 옥마를 죽였다고 한다. 후로 경순왕은 밤에 잠을 때마다 악몽에 시달리다 고려에 항복을 하였다고 한다. 당시 화살을 맞은 옥마가 하늘로 날아올라 죽은 자리인 성주산 산봉우리를 옥마봉이라고 하고 그러한 전설이 있는 산의 이름도 옥마산(玉馬山,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소재, 해발 601m)이라 불리 운다. 옥마산은 보령시 명천동(鳴川洞) 남포면(藍浦面) 호위하는 모습으로 우뚝 솟아있는데, 곳에 방송사 중계탑이 설치되어 있어 누구든지 쉽게 찾을 있다. 옥마산 자락엔 보령시청이 자리잡고 있어서 보령시청을 찾아가 산행을 시작하면 된다.

오늘날처럼 고속도로나 좋은 길이 뚫려있는 것도 아닌 경순왕이 살던 시절에는 한번 오가려면 달이 넘게 걸리는 길이었을 터인데, 당시 견훤과 왕건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리던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 웬일로 동쪽의 끝에서 서쪽의 끝에 놓여있는 서해의 바닷가 충남 보령까지 와서 한가롭고 여유롭게 거주하였기에 그와 관련된 유적이 많은 것인가?

보령의 성주산 이외의 지역에서도 경순왕의 유적지를 어렵지 않게 찾아 있는데, 우선 왕대사(王臺寺, 충남 보령시 내항동 97)라는 절을 꼽을 있다. 사찰은 대천해수욕장 못미처 바닷가에 왕대산(王大山, 해발 123.9m)이라는 조그마한 위에 소재하고 있는데, 경순왕이 보령지방에 이곳에서 미륵세계 실현을 위해 순례했다 하여 왕대산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왕대사의 이름도 여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왕대사 서쪽 암벽에는 음각으로 새겨진 벽화인 왕대사마애불(王臺寺磨崖佛) 비바람에 풍화에 맞서 천년의 오랜 세월을 묵묵히 이겨내고 있다. 많이 흐릿해졌지만 미륵불 어깨부분의 법의와 좌측 몸통 뒤에서 나오는 신광이 표현되어 예술적인 가치가 높은 문화 유적이라 한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해일 사고(2008.05.04.) 관광객 9명의 생명을 앗아간 대천해수욕장 남쪽 방파제의 죽도라는 섬에서 마주 보이는 간척지 한가운데 있는 아주 조그마한 보리섬(맥도,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면 월전리)에도 경순왕의 유적이 신라 최고의 학자이자 종교인이며 문장가로 알려진 최치원의 유적과 함께 있다(최치원이 경순왕과 보령에서 자주 만나던 사이였음은 보령지방 곳곳에 남아 있는 금석문(金石文) 등에서 있다). 예전에 섬이었던 보리섬은 1986 시작된 간척지 공사로 인하여 현재는 한가운데 있는 육지이다.

보리섬 근처의 제석리(충청남도 보령시 남포면 제석리)라는 마을에는 경순왕 경모전(敬順王 景慕殿) 있어 해마다 후손들인 경주김씨(慶州金氏) 경순왕파(敬順王派)들이 제례를 지내 있으며, 제석리 바로 마을인 창동리(충청남도 보령시 남포면 창동리)라는 곳에는 경순왕 유적비(敬順王遺蹟碑) 위치하고 있다.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다 보면 보령시 웅천읍 무창포해수욕장에 이르러 경순왕이 쌓도록 했다는 성을 수가 있다.

이처럼 보령지역의 곳곳에서 경순왕에 관한 전설과 이야기들을 어렵지 않게 들을 있어 동쪽 신라의 경주 경순왕이 서쪽의 보령지방에서 오래도록 머물렀다는 것을 있다. 도대체 신라의 경주에 있어야 경순왕은 어인 일로 서쪽의 끝에 놓인 마을 보령에 와서 머물렀던 것인가? 경순왕의 후손인 본인으로선 궁금증을 풀지 않을 없었다.

신라가 백제를 치욕적으로 멸망시켰다는 과거 역사의 원한을 가진 포악스럽기만 후백제 견훤의 횡포에 견디다 못한 신라의 경순왕은 고려의 왕건에게 항복을 하게 된다. 왕건은 대통합정책을 펼치게 된다. 대통합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항복한 신라의 경순왕을 신하로 삼고, 자신의 딸인 낙랑공주와 혼인을 치르게 하여 사위로 삼는다. 이러한 호의는 행여라도 변절하지 못하도록 하는 수단이기도 했을 것이다.

또한, 고려에 항복함으로서 멸망한 신라이지만 천년을 이어온 영남지역에서의 기반을 가진 왕조의 임금이었던 경순왕에게 결코 작지 않은 지역에 대한 영향력이 있음을 감안하면 왕건의 입장에서는 매우 위험스러움과 부담스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여, 왕건은 영남지역과 경순왕을 분리시키는 정책을 펼친다. 견훤의 후백제 땅이었던 충남의 보령지방을 경순왕으로 하여금 고려의 신하가 되어 과거 후백제의 영토를 관리하도록 것이다. 결국 경순왕은 경주를 떠나 천리 보령지방으로 오게 것이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영향력이 컸던 영남지역에서 분리되게 것이다.

후백제의 견훤은 불과 8 경순왕의 바로 전대(前代) 임금인 경애왕을 강제로 자살시킨 장본인이었다. 신라인들에게 있어선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讐)였던 견훤의 땅이었던 보령지방을 고려의 신하가 경순왕이, 견훤과 그의 지지세력들에 대한 원한을 갖고 있던 경순왕이 얼마나 철두철미하고 지독하게 다스렸을지는 자명한 일이 아니라 없을 것이다.

시작된 얼마 어설프게 관리했다가는 언제 어디서 반란이 터질지도 모르는 불안하기만 했던 고려의 왕건 왕조는 반골 기질이 강력했던 후백제의 보령지방을 경순왕으로 하여금 성공적으로 관리하도록 하면서 동시에 영남지역에서 경순왕을 분리시켜 냈던 것이다. 고려 왕건의 소름끼치도록 탁월한 치밀함을 엿볼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고려의 왕건 왕조는 후삼국을 통일을 하는 과정과 통일 직후 혼란한 시기에 피를 가장 적게 부른 왕조로서, 땅에 생겨난 왕조 대통합과 소통의 전략이 가장 탁월한 성공한 왕조가 아니었나 감히 평가해 본다.

대통합과 소통이 부족하기만 우리나라 작금(昨今) 현실을 고려할 , ‘압도적인 힘으로 강제하는 억압보다는 조금은 어렵지만 왕건과 같은 고도의 전략적 사고가 필요하지는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신라 왕조를 집어삼키려 고려에게 위기에 처한 신라가 스스로 구원을 청하도록 의도적으로 친밀하게 혹은 만만하게 느끼도록 보인 왕건,
신라가 결국은 멸망하도록 반대세력인 후백제의 견훤을 움직인 전략의 왕건,
살기등등한 견훤마저도 맏아들인 신검(神劒) 싸움이 붙어 고려에게 투항하도록 하여 후백제도 무혈 점령한 왕건,
후백제에게 철천지의 원한을 가진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으로 하여금 질기고 지독한 반골정신을 가진 후백제의 영토 일부를 다스리도록 하여 화근을 없애버린 왕건,
영남지역의 경순왕을 후백제의 보령지역으로 보내 집권토록 하여 비록 패망했지만 천년사직(千年社稷) 영향력이 강했던 경순왕을 자연스럽게 분리해 치밀한 전략의 왕건......

아주 오래된 옛날의 일이지만 대통합과 소통의 전략을 배우기 위해서 한번쯤은 찬찬히 들여다 필요가 있을 것이라 생각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