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September 13, 2006

이미륵 - Mirok, Li ... 정신이 살아있는 귀골풍의 단아한 미남자

이미륵의 묘소는 오랫동안 찾는 이 없이 이 묘원의 응달지고 습기찬 한쪽에 방치되어 있다시피 했다. 이제는 조국을 바라보며 양지바른 쪽에 자리하고 있지만 이장해서 이처럼 제대로 모습을 갖추기 까지에는 많은 이들의 수고와 애통이 있었다.
1972년 당시 독문학 박사학위 논문 시한에 쫓기던 30대의 늦깎이 유학생 정규화씨는 모든 일을 밀쳐두고 관리비를 내지 않아 폐묘가 될 위기에 있던 이미륵 박사 묘지 살리기를 위해 동분서주했다. 1965년 뮌헨대학 뒷길 한 고서점에서 시작된 정규화씨의 이미륵 기리기는 실로 거룩한 데가 있다.
 
“이박사의 혼백이 나를 이끌고 다녔음이 분명합니다. ‘미륵리 게젤샤프트(독일인들의 이미륵 추모회)’ 회원들을 비롯, 프랑스와 벨기에 미국과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실로 수많은 지역의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뜻밖의 장소, 의외의 인물들에게서 이미륵의 유고와 자료들이 쏟아져 나올 때마다 나는 그의 혼백이 나를 또 이곳에 이끌고 왔구나 느끼곤 했지요.”
 
정규화는 이미륵이 우리 근대사의 가장 걸출한 인물의 하나라는 확신에 흔들림이 없었다.
 
이박사는 실로 전무후무할 정도의 복합재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독일 저명신문에 〈압록강은 흐른다〉 서평만도 1백회 이상이 실렸지요. --독어 등 세계 주요 언어로 번역되어 나가면서 〈압록강은 흐른다〉는 펄벅의대지가 중국을 알린 것 못지 않게 한국을 드러내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다 쫓기듯 독일로 가서 망명자 신분으로 살면서도 벨기에의 피압박 민족대회에까지 참석하여 직접 태극기를 그리고 일본의 죄악상을 알리기도 했을 만큼 애국지사이기도 했습니다. 이학박사였지만 서예와 한시에도 일가를 이룬 분이었지요.”
서울대학교 독문과 박환덕 교수를 통해 그의 자작 한시를 본 적이 있었다. 10대에 조혼했다가 두고 떠나온 아내에게 쓴 회한의 시였다. 한때 애타게 그리워했지만 부부 인연이 다해 이별할 수 밖에 없었음을 토로한 눈물겨운 내용이었다.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조선 선비정신이 살아 있는 그 서예의 골기 또한 빼어난 것이었다.
 
그의 무덤에 가기 전날 밤, 나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얀 알약을 두 알 삼키고 보니 약병에는 한 알 이상은 복용하지 말라고 씌어 있었다.
 
“눈앞에 푸른 밤안개의 강이 펼쳐져 있었다. 압록강이라고 했다. 밤안개 속을 건너가는 한 청년이 보였다. 검은 두루마기의 그가 나를 돌아다본다. 귀골풍의 단아한 미남자였다. 참 잘생긴 얼굴이구나, 정신이 살아 있어, 요새 저런 얼굴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떴다. 짧은 꿈치고는 너무도 생생했다.
 
이미륵이 우리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59년 독일유학생 전혜린과 초대 국립중앙박물관장 고 김재원 박사 등의 간헐적인 신문 잡지 기고를 통해서였다. 그 외에 간혹 그를 연모했던 독일 여인들 이야기나 30년 세월 그를 후원했던 자일러(Seyler)가 사람들의 얘기가 소개 되었을 뿐이다.
 
특히 1949 11월 위암 수술을 받고 요양소에 머무르고 있을 때 마지막까지 대소변을 받아냈다는 '에파 이야기'나 이미륵이 지상에서 남긴 마지막 편지힐게 볼모르트에게(고서점 주인이었던 그녀는 1997년 유언대로 이미륵 묘소 바로 뒤에 묻혔다)’는 가슴을 친다.
 
아직도 베일에 싸인 이미륵. 맑고 곧은 조선의 선비정신을 독일에 심고 떠난 그의 압록강 건너기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