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은 흐른다〉를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번역하여 소개하기도 했던 전혜린은 이미륵 선생을 ‘귀족 출신’, ‘명상적인 얼굴’ 등의 단어로 표현하였다. 이런 표현을 받을 수 있는 얼굴이 오늘날 과연 얼마나 있을까?
‘이미륵 기념사업회’에서 공개하고 있는 이미륵 선생의 사진들을 보면 전혜린의 표현이 전혀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매 사진마다 거의 항상 ‘명상적인 얼굴’로 등장한다.

‘귀족’, ‘명상적인 얼굴’, ‘깨끗함’, ‘맑음’, 이런 낱말들을 쓸 수 있었던 전혜린의 감각을 찬탄하고 싶다. 그에 비하면 ‘섬세한 얼굴선과 깊은 눈매가 인상적인 선비풍의 사내’라는 어떤 현대작가(정미경)의 수사는 얼마나 격이 낮은가.
전혜린 세대만 하더라도 그런 감각들에 어느 정도 익숙했는데, 정미경 세대에서는 <압록강은 흐른다>를 읽고 “소박함과 온기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을 알맞게 붓고 장작불을 정성껏 지펴서 갓 지어 낸 더운 쌀밥 같은 글”이라고 평할 정도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열한 살 때 신식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첫날, 이미륵은 아버지에게 고백한다. 나는 이 고백이 그가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딴 뒤에도 여전히 유효했으리라고 본다
“학교의 모든 것이 낯설었어요. 오랫동안 저는 무서워지기도 했어요. 거기는 전혀 내 마음에 안 들 것 같아요. 이제까지 제가 익숙해 있던 것과는 모든 게 너무 다른 까닭인가 봐요.”
아버지는 오랫동안 잠자코 있었다. “그럼 슬프더냐?” 아버지는 나중에야 이렇게 물었다.
“좀 그와 비슷한 생각이 들었어요. 옛 서당과 우리 집을 자꾸자꾸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아버지는 아들의 두려움을 달래려 아들을 가까이 불러 소동파의 시를 외워보라고 한다.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아들은 몇 편을 읊는다. 그중에는 오십 구에 가까운 ‘영탄가’도 있었으니 그것은 아마도 <적벽부>였을 것이다. 열한 살의 아이는 소동파의 <적벽부> 수준의 시를 읊고는 마침내 마음이 진정된다.
아버지는 아들을 언제나 이런 식으로 대한다. 그에게는 품위가 있고 침묵이 있고 고고한 내면이 있다. 그 훌륭했던 이미륵의 아버지는 이미륵이 신식학교를 다닐 때 작고한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아들은 신학문에 적응하려고 애를 쓴다. 그렇지만 수학, 물리, 화학이 어렵다고 어머니에게 고백한다. 어머니는 공부하느라 늦게 자려는 아들을 말리며 이렇게 말한다
“네가 이 학교에서 충분히 재주가 없더라도 괜찮아! 우리 모든 사람에게 낯설기만 한 이 새로운 문화는 네게도 맞지 않은 거다. 지난 일들을 생각해 보아라! 너는 얼마나 쉽게 고전 대가와 시를 배웠었니! 너는 정말 총명했단다. 너를 그토록 괴롭히는 신식 학교를 그만두거라. 그리고 몸도 회복할 겸 올 가을에 시골 송림 마을에 가 있거라. 그곳은 제일 작은 땅이지만 우리에게는 가장 소중한 농토이다. 그곳에는 밤나무며 감나무도 있단다. 거기 가서 푹 쉬거라. 우리의 농가들과 그들이 하는 일을 익혀두어라. 이 불안한 도시보다 오히려 한적한 시골에서 너는 잘 자랄 거다. 너는 바로 옛 시대의 아이다.”
옛 시대의 아이, 〈맹자〉와 〈중용〉을 배웠고 율곡의 글을 청서했고 소동파의 〈적벽부〉를 외는 아이, 아버지로부터 “상대방이 돌을 놓거든 소리가 울리는 동안에는 기다려라”는 말과 함께 바둑을 배운 아이, 아버지의 시조창을 들으며 술을 배운 아이, 그 아이가 이제 바다를 이웃한 송림 마을에서 농부와 어부의 생활을 보고 느끼며 생활하게 된다. 이것이 훗날 그에게 얼마나 아름다운 기억으로 회상되었을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