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September 16, 2006

이미륵 - 명상적인 얼굴의 이미륵, 이해보다도 선망이 앞서는 고전의 세계…

〈압록강은 흐른다〉를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번역하여 소개하기도 했던 전혜린은 이미륵 선생을 귀족 출신’, ‘명상적인 얼굴등의 단어로 표현하였다. 이런 표현을 받을 수 있는 얼굴이 오늘날 과연 얼마나 있을까?
 
‘이미륵 기념사업회에서 공개하고 있는 이미륵 선생의 사진들을 보면 전혜린의 표현이 전혀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매 사진마다 거의 항상명상적인 얼굴로 등장한다.
전혜린은 또한 李彌勒 씨가 살고 생각한 것은 현대의 한국 사람으로서는 이해보다도 선망이 앞서는 유리알처럼 맑고 조화에 찬 고전의 세계라고 하기도 했다.
 
‘귀족’, ‘명상적인 얼굴’, ‘깨끗함’, ‘맑음’, 이런 낱말들을 쓸 수 있었던 전혜린의 감각을 찬탄하고 싶다. 그에 비하면섬세한 얼굴선과 깊은 눈매가 인상적인 선비풍의 사내라는 어떤 현대작가(정미경)의 수사는 얼마나 격이 낮은가.
 
전혜린 세대만 하더라도 그런 감각들에 어느 정도 익숙했는데, 정미경 세대에서는 <압록강은 흐른다>를 읽고소박함과 온기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을 알맞게 붓고 장작불을 정성껏 지펴서 갓 지어 낸 더운 쌀밥 같은 글이라고 평할 정도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로서는 흉내내기도 힘든 명상적인 얼굴을 가졌던 그 이미륵은 서양문물에 대하여 어떤 인상을 가졌을까? 이제 우리는 온통 서양화된 한국에서 살고 있는데, 이미륵이 살아 있다면 우리들에 대하여 어떤 인상을 가질까?
 
열한 살 때 신식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첫날, 이미륵은 아버지에게 고백한다. 나는 이 고백이 그가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딴 뒤에도 여전히 유효했으리라고 본다
 
“학교의 모든 것이 낯설었어요. 오랫동안 저는 무서워지기도 했어요. 거기는 전혀 내 마음에 안 들 것 같아요. 이제까지 제가 익숙해 있던 것과는 모든 게 너무 다른 까닭인가 봐요.”
 
아버지는 오랫동안 잠자코 있었다. “그럼 슬프더냐?” 아버지는 나중에야 이렇게 물었다.
“좀 그와 비슷한 생각이 들었어요. 옛 서당과 우리 집을 자꾸자꾸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아버지는 아들의 두려움을 달래려 아들을 가까이 불러 소동파의 시를 외워보라고 한다.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아들은 몇 편을 읊는다. 그중에는 오십 구에 가까운영탄가도 있었으니 그것은 아마도 <적벽부>였을 것이다. 열한 살의 아이는 소동파의 <적벽부> 수준의 시를 읊고는 마침내 마음이 진정된다.
 
아버지는 아들을 언제나 이런 식으로 대한다. 그에게는 품위가 있고 침묵이 있고 고고한 내면이 있다. 그 훌륭했던 이미륵의 아버지는 이미륵이 신식학교를 다닐 때 작고한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아들은 신학문에 적응하려고 애를 쓴다. 그렇지만 수학, 물리, 화학이 어렵다고 어머니에게 고백한다. 어머니는 공부하느라 늦게 자려는 아들을 말리며 이렇게 말한다
 
“네가 이 학교에서 충분히 재주가 없더라도 괜찮아! 우리 모든 사람에게 낯설기만 한 이 새로운 문화는 네게도 맞지 않은 거다. 지난 일들을 생각해 보아라! 너는 얼마나 쉽게 고전 대가와 시를 배웠었니! 너는 정말 총명했단다. 너를 그토록 괴롭히는 신식 학교를 그만두거라. 그리고 몸도 회복할 겸 올 가을에 시골 송림 마을에 가 있거라. 그곳은 제일 작은 땅이지만 우리에게는 가장 소중한 농토이다. 그곳에는 밤나무며 감나무도 있단다. 거기 가서 푹 쉬거라. 우리의 농가들과 그들이 하는 일을 익혀두어라. 이 불안한 도시보다 오히려 한적한 시골에서 너는 잘 자랄 거다. 너는 바로 옛 시대의 아이다.”
 
옛 시대의 아이, 〈맹자〉와 〈중용〉을 배웠고 율곡의 글을 청서했고 소동파의 〈적벽부〉를 외는 아이, 아버지로부터상대방이 돌을 놓거든 소리가 울리는 동안에는 기다려라는 말과 함께 바둑을 배운 아이, 아버지의 시조창을 들으며 술을 배운 아이, 그 아이가 이제 바다를 이웃한 송림 마을에서 농부와 어부의 생활을 보고 느끼며 생활하게 된다. 이것이 훗날 그에게 얼마나 아름다운 기억으로 회상되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