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September 12, 2006

이미륵 - 〈압록강은 흐른다〉의 서사구조

1899년 출생,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 잠시 신식학교 공부, 독학으로 1917년 경성의학전문학교 입학, 3학년이 되던 1919년 삼일운동에 가담한 뒤 망명의 길에 올라 1920년 독일에 도착. 이것은 이미륵의 스물 두 살까지의 이력이면서 동시에 〈압록강은 흐른다〉의 서사 구조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이미륵의 어린시절에 대한 자전소설이다. 독일 출판사 사장에게 보낸 그의 편지는 이 소설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나의 소설은 나의 소년시절에 체험한 일들을 소박하게 그려 보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는 이러한 체험담을 서술하는 데 장해가 되는 모든 설명과 묘사는 피했습니다. 동시에 동양인의 내면 세계에 적합하지 아니한 세계적인 사건들은 비교적 조심성 있게 다루었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순수하게 그려냄으로써 한 동양인의 정신 세계를 제시하려고 시도한 것입니다. 이것은 나에게는 아주 친근한 것으로 바로 나 자신의 것입니다.”
 
아마 이미륵이 이 소설을 우리나라에서 우리말로 쓰려 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린 시절 한학을 이수했던 우리 아버지 세대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을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세대는아버지 세대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을 내용과 전면적으로 단절되고 말았다. 이제 한학은 일반인에게 서양의 그 어떤 학문보다도 낯설다.
 
그 정신세계도 아주 낯설다. 그 정신세계에 접근하는 방식과 자세도 옛 세대와는 완연히 다르다. 그래서 나는 초중고 교육 및 대학 교육에서 이수한 학문적 방법만으로는 옛 세대의 정신세계를 파악하기는 커녕 접근하기조차 힘들지 않나 하는 생각까지 해본다.
 
그러나 옛 세대의 내면세계는이미륵에게 아주 친근한 것이었고, 그는 그친근한 것이 서양의 정신세계와 얼마나 다른 것인지 알았다.
 
〈압록강은 흐른다〉는 독일인들에게이미륵 자신의 것’, ‘소년 시절의 체험을 보여줌으로써한 동양인의 정신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도동양인의 내면 세계에 적합한 방식으로.
 
이미륵이 제시하려고 시도한한 동양인의 정신세계는 다름아닌 우리 아버지 세대의 정신세계이며, 우리 아버지 세대를 가르쳤던 할아버지 세대의 정신세계이다.
 
그것은 동양의 내면세계에 문외한인 서양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지만, 오늘날에 이른 이 시점에서는 역설적이게도, 정확히 우리 세대를 대상으로 한 것이라고 보아도 전혀 틀리지 않다. 그는 오늘날 우리 세대 중 어느 한 사람도 재현할 수 없을 세계를 재현했다.
 
〈압록강은 흐른다〉는 독일이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이듬해 독일에서 출간되었다. 독일인들의 정신적 폐허에 한 동양인의 정신세계가 주어진 것이다. 어느 독일인들보다 더 처참한 상황을 경과했던 한 연약한 이방인이 그토록 맑은 정신과 그토록 고귀한 품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그들은 아마 충격과 경이를 느꼈을 일이다.
 
이미륵은 이 소설에서 그 맑은 정신, 그 고귀한 내면이 동양의 한 구석진 나라에서 어떻게 형성되었던가를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한 소년의 성장과정에는 무엇보다도 동양의 시적인 세계가 있으며, ‘신식학문에는 깊은 뜻을 지닌 문장이 없다고 평하는 어린 누이의 고고함, ‘네 정신이 언제나 맑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아버지의 고귀한 위엄, 어머니의 그림자 같은 아름다움이 있다.
 
내가맑음’, ‘내면’, ‘품위’, ‘고고함’, ‘고귀’, ‘위엄’, ‘아름다움등의 낱말들을 쓰긴 했지만, 이것들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감수성으로는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없다.
 
현대의 감수성을 버리고 오직 옛 세대의 세계에 온전히 들어서는 자만이 그 낱말들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많은 낱말들은 이 시대에 제 품위를 잃은 채로 유포되고 있다. 예를 들자면, 옛 세대의 세계에서 어머니의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이다:
 
“너는 종종 용기를 잃는 일이 있었으나 그래도 네 길에 너는 충실했었다. 나는 너를 크게 믿는다. 그래, 용기를 내거라. 너는 국경을 쉽게 넘고 결국 유럽에도 갈 것이다. 이 어미 걱정은 전혀 하지 말아라. 나는 네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겠다. 세월은 매우 빨리 가느니라. 비록 우리들이 다시 만나지 못하는 일이 있어라도 너무 서러워 말아라. 너는 내 생애에 있어서 나에게 정말 많은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 , 얘야! 이젠 너 혼자서 네 길을 가거라!”
 
위 인용문은 이미륵이 불과 스무 살 남짓할 때에 그의 어머니가 기약 없는 망명길을 권하며 한 말이다. 이 망명길은 아들과 어머니의 영원한 이별길이 되고 말았다.